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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짱없는 베짱이 Aug 29. 2018

31. 마음을 다한다는 것

2017.6.11. 따리하, 볼리비아(D+125)

"솜사탕 먹을래? 내 선물이야." 바람에 뚝 떨어져 버린 솜사탕을 아라셀리는 아무렇지 않게 내게 내밀었다. 그리곤 조곤조곤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고, 나는 따리하의 첫 햇살을 배우가 꿈이고 <꽃보다 남자>의 준표 같은 한국인 남자 친구를 만들고 싶은 14살 소녀와 함께 솜사탕을 팔며 맞이했다.




여전히 M과 함께였지만 감기 기운이 남아있던 M은 몸 상태가 내내 좋지 않아 볼리비아에선 혼자 나오는 날이 많았다. 따리하에서의 첫 날도 그랬다.

전날 밤의 추위는 모두 허상이었는 듯 거리마다 햇살이 강렬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입고 나온 스웨터가 더웠지만, 저녁이 되면 또다시 스웨터로는 모자랄 정도로 추워지리라. 이곳은 늘 그런 동네니까.


따리하. 볼리비아에서 가장 기후가 온화하고 쾌적한 도시 중 하나. 그래서인지 농목축업이 발달했다는데 특히나 양질의 포도 생산으로 와이너리가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볼리비아는 온통 안데스 산맥의 대지에 스며든 나라, 도시의 해발고도는 1,924m에 달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한라산 정상에 가까운 정도의 높이랄까? 그러니까 이곳의 와인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서 생산되는 포도로 만든 와인이라고 한다. 상상이 안 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이곳은 볼리비아에서 지대가 높지 않은 편으로, 그러니 기후도 적당하고 살기 좋은 곳이라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두 번째 볼리비아 방문의 첫 번째 목적지를 이 도시로 잡은 이유는 단연 와인 때문이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와이너리 방문과 같은 관광객 모드는 조금 더 도시와 친해 진 뒤의 일로 미루어 놓았다.

바둑판 식으로 늘어선 거리를 걷는데 아기자기하고 여유로운 느낌의 건물들이 동선 따위 생각하지 않고 아무 데나 걸어 다녀도 기분이 좋았다. 지도를 보니 도로 사이로 틈틈이 공원이 보이기에 나오는 공원들마다 한 번씩 앉아서 쉬는 걸 오늘의 일정으로 잡아야겠다 했는데, 그건 겨우 두 번째 공원에서 끝났다. 솜사탕을 파는 소녀 아라셀리를 만났기 때문이다.


아라셀리를 만난 수크레 공원.
아라셀리가 팔고 있던 솜사탕.


그곳에는 기다란 막대에 빽빽이 솜사탕을 꽃아 파는 소녀가 있었다. 의식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슬금슬금 내 옆으로 온다. 마침 불어온 바람에 꽂혀있던 솜사탕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비닐봉지에 한번 씌워진 채였지만, 주워서 탈탈 털더니 그걸 내게 선물이라고 내미는 아이. 두 번 정도 사양 끝에 솜사탕을 받아 들자 아이는 옆에 앉아 떠들기 시작했다. 아라셀리는 아직 초등학생인데 솜사탕을 만드는 23살 오빠와 둘이 살고 있고, 솜사탕을 파는 것이 그녀의 일이었다. 잘 알아듣지 못하는 내게, 내가 스페인어를 가르쳐줄까? 하더니 종이에 글씨까지 써가면서 알려주는데 꽤나 똑똑한 녀석 같다. 왜 여기서 이렇게 솜사탕을 팔며 살아가야 할까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라셀리는 특히 한국에 관심이 많았는데 알고 보니 그 이유는 드라마 <꽃보다 남자> 때문이었다. '준표' 이야기를 그렇게 하더니, 자기 또래의 한국인 남자 친구를 사귀는 것이 소원이라고 나한테 소개를 해달란다. 자꾸 나도 잘 알지 못하는 한국 드라마, 연예인 이야기를 하며, 자기 꿈이 배우라고 내가 들고 있는 핸드폰으로 자기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녹화해 달라고까지 했다. 대화를 나누고, 또 다른 곳으로 함께 이동하는 중에도 솜사탕은 틈틈이 계속 팔려나갔는데, 어느새 들고 나온 솜사탕의 반절이 사라져 있었다.


여행지에서 친구를 사귀는 건 늘 즐거운 일이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좀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 그것도 자꾸 남자 친구 소개를 강요하는 이 아이는 좀 힘들다. 이제 슬슬 헤어져야겠다 마음을 먹는데 문득, 아이에게 돈을 좀 주어야 하나 아니면 솜사탕을 몇 개 사야 할까 고민이 들었다. 솜사탕은 하나에 3볼, 우리나라 돈으로 치자면 5백 원 정도랄까. 비싼 것도 아닌데 사실 늘 잘 모르겠는 것은, 이 안타까운 감정이 괜찮은 것인지, 그렇다면 안타깝다고 느낀 사람들에게 과연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다.

이 곳에 와서 나는 나보다 못살고 못 먹고 좋은 형편을 갖추지 못한 것 같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도, 말하자면 물질적인 무언가를 베푼 적이 별로 없었다. 그 행위가 뭔가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있다는 의미 같았고, 그 사실이 어쩌면 진짜 속마음이었기에 들키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 물질이 아닌 다른 부분으로 내게 많은 것들을 베풀어 준 그들이니, 물질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베풂이라면, 그들은 그대로 좋아하며 받아들였을 것 같다. 그 모든 게 내가 가진 것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나눌 수 있는 것을 나누는 것이었을 테니.  

결국 나는 배가 고프다며 아라셀리를 데리고 그녀가 먹고 싶다는 음식을 사서 같이 나눠먹는 것으로 그날의 만남을 마무리를 지었다. 다음날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지는 길이었지만, 솜사탕을 들고 공원에 남은 그 아이를 두고 오는 것이 괜히 가슴이 불편했다. 그 불편한 마음이 진짜 그 아이를 위한 마음이었는지, 해야 될 도리를 못하고 온 것 같은 나 때문이었는지는 깨달을 수 없었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이곳에서 만난 친구들은 길거리에서 팔찌나 솜사탕을 팔고, 고국을 떠나 보다 돈을 벌기 쉬운 나라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러면서도 사과 한 조각조차 개미와 나눠먹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처음엔 경계의 마음이 앞서서, 그리고 나중엔 미처 인식하지 못했기에, 대체로 나는 그들을 위해 많은 돈을 쓰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들과 있으면 대체로 돈을 쓸 일이 별로 생기지 않기도 했다.)

지금도 가끔 잘 모르겠을 때가 있다. 마음을, 그리고 시간을 나누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내가 더 나눌 수 있었던 것을,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었을 어떤 것을 하지 않았으니 부족한 사람인 걸까. 화장실이 급해지는 바람에 그래도 솜사탕을 하나는 사서 M에게 가져다준다는 것도 깜박한 채였다. 벌써 5시가 가까워졌다. 해가 지면 또다시 찬 공기가 내려앉겠지. 난 오늘이 따리하의 첫날이었는데. 실은 이 녀석의 이야기를 들으며 솜사탕이 팔릴만한 장소를 찾아 함께 돌아다니느라 하루가 다 지나버린 것 아닌가.

하지만 아라셀리가 나에게 내민 솜사탕은 그 녀석이 할 수 있던 최선이었을 거다. 나 스스로에 대한 위안일지도 모르겠지만, 나 역시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따리하에서 와이너리 구경하기
Rute del vino(와인의 길)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따리하는 와이너리가 많은 동네. 어느 호스텔에서든 와이너리 투어에 대한 다양한 상품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장기여행자 답게 여행사를 끼지 않고 직접 찾아다니기로 했고, 동네에서 가장 가깝고 가기 쉬운 듯한 까사 비에하(Casa vieja)와 규모도 크고 가장 대기업(?)에 가까워 보이는 캄포스 데 솔라나(Campos de solana) 두 군데를 다녀왔다.

-까사 비에하 Casa vieja
시장 근처에서  콜렉티보를 타면 편도로 7볼. 가족이 운영하는 농장같은 느낌으로 별도의 내부 프로그램 없이 언제든 방문하여 둘러볼 수 있다. 입장료 무료. 포도밭이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이 있어 식사와 함께 와인을 마실수도 있다. 와인의 종류는 많지 않은데  단맛의 세기에 따라 3종류가 있어 고를 수 있다.
-캄포스 데 솔라나 Campos de solana
이 지역에서 유명한 유명한 까사 레알(casa real)이라는 브랜드의 와인을 생산하는 곳. 역시 콜렉티보를 이용해서 갔다. 투어 입장료 5볼. 영어와 스페인어 중 언어를 선택할 수 있고, 전 공장을 돌아보며 와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한 모금의 시음도 불가능하고  마시고 싶으명 병을 사서 마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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