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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이 Feb 14. 2024

휴직. 부모님께 알려 말어?

흔한 안부전화를 거는 일도 손에 꼽을 정도로 부모님과 데면데면한 남편. 그럼에도 명절에는 본가에서 1박 2일을 고집하는 터라 이번 설에도 시댁에서의 하룻밤이 예정되어 있었다. 결혼 10년 차에 접어드니 이제는 그런 일상도 익숙해져 '하루쯤은 괜찮지 뭐'라는 기분으로 짐을 챙긴다. 나를 위한 속옷 한벌, 잠옷세트, 칫솔이나 화장품 등이 여전히 존재하는 친정과 달리 어르신 두 분만 사는 시댁에는 흔한 폼클렌징조차 없어 1박 2일이었지만 꾸려야 할 짐이 꽤 많았다. 분주한 나와는 달리 남편은 아이 입단속에 더 신경을 썼다.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아빠가 집에서 놀고 있다고 절대로 말하면 안 된다!"


남편의 휴직이 결정된 직후 바로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한 나와는 대조적으로 남편은 절대로 부모님께 휴직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한 번은 한낮에 시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온 적이 있었는데 행여나 들킬세라 텔레비전을 끄고 구석방에 숨어 전화를 받을 정도였다. 회사를 그만두거나 잘린 것도 아니고, 혹여 퇴사를 했다 해도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는 이상 아들이 알아서 할 일인데 그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숨길 이유가 있을까 싶었지만 남편은 필사적이었다. 마흔이 넘어서도 자식은 부모 눈치를 살피기 마련인가보다. 


"괜히 귀찮잖아. 왜 쉬냐고 이것저것 묻는 것도 그렇고 놀면 안 된다 잔소리 듣기도 싫고."


덕분에 우리는 시댁에는 휴직사실을 숨기기로 합의한 공범이 되었다. 하지만 아빠의 깊은 뜻을 알 리 없는 아들. 혹여나 철없이 말실수라도 할까 설날을 앞두고 남편은 노심초사였다. 


사실, 친정부모님은 남편의 휴직 사실을 일찍부터 알고 계셨다. 동년배 보다 훨씬 젊은 마인드로 사시는 엄마도 처음에는 갓난아기도 아니고 초등 아들을 위해 휴직한다는 사실에 좀 의아해하시며 "노는 버릇되면 쓴다." 라는 말을 먼저 던졌다. "놀면서 게을러지면 안돼. 자격증이라도 따라고 해라." 하신건 아빠였다. 딸에게는 그렇게 말해놓고 막상 사위 앞에서는 잘 생각했다며 년동안 하고 싶었던 마음껏 해보라고 응원을 해주셨지만 말이다. 


반면, 시부모님은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마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사시는 분들이다. 두 아들 모두 장성하여 믿을만한 회사에 취직했고, 두 분이 먹고 사시기에 지장 없을 만큼 충분히 모아두셨고, 노후준비는 물론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까지 마련해 두었으니 걱정 말라는 말을 수시로 하시는 분들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끼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분들. 길거리에 떨어진 유흥업소 전단지마저 구청에 가져다주면 돈을 준다며 주워오시고, 칠순이 넘은 아버님은 돈 버는 재미로 산다며 일거리를 찾아 불러주는 곳은 어디든 나가시는 분이다. 그런 분들 앞에서 이제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꼴랑 20년도 되지 않은 젊은 놈이 '일이 힘들어 좀 쉬려고 한다'라고 말하면 뭐라고 하실까. 아마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기를 쓰고 휴직 사실을 숨길 수 밖에. 


휴직 사실을 솔직히 고백한 친정에는 "엄마, 이번 설에는 남편이 휴직이라 용돈은 넉넉히 못 넣었어." 하며 홍삼세트와 상품권으로 새해 인사를 대신했지만 끝내 휴직 사실을 숨긴 시댁에는 평소와 같은 금액의 용돈을 드려야 했다. 설 보너스도 받지 못한 데다가 휴직할 때 양가 어른들의 용돈까지는 생각지 않았던 터라 용돈을 좀 줄이자고 남편을 설득했지만 결국 합의를 이루지 못한 탓에. 


우리 가족의 비밀 아닌 비밀은 추석까지 지켜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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