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는 최고의 자아성찰

아이를 관찰하며 나를 깨닫는다.

by 책봄

아이를 통해 내 과거를 본다.


나는 분리불안이 심한 아이 었다. 내가 기억하는 분리불안의 절정은 초등학교 때다. 부모님은 나와 동생을 두고 외출하셨다. 몰래 한 외출은 아니었고 미리 모임에 다녀오겠다고 말씀하셨다. 동생과 나는 잠이 들었다. 깊이 잠들지 못했는지 잠시 깼다. 부모님이 돌아오지 않았다. 늦어봤자 11시쯤이었을 거다. 아직 버스가 지나다닐 시간이었으니까. 밖은 어둡고 집안은 고요했다. 갑자기 불안이 밀려왔다.


'엄마, 아빠가 안 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온통 엄마, 아빠가 사고가 나서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때부터 거실 창문 앞에서 부모님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지금처럼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라 전화도 할 수 없었다. 골목 끝에 자동차 불빛이 보일 때마다 '왔다!' , '아니네'를 반복하며 1시간을 넘도록 서 있었고 결국 울음이 터졌다. 자고 있던 동생이 일어나 나를 달랬다.


"누나, 금방 오실 거야. 같이 자자."


눈물은 멈추지 않고 불안은 점점 더 커졌다. 그렇게 뜬 눈으로 엄마, 아빠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한 번이 아니었다. 비슷한 일은 여러 번 있었다. 매번 엄마, 아빠가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상상하며 울었다.



나를 이해하는 것이 곧 아이를 이해하는 일이다.


커가면서 분리불안은 자연스레 없어졌고 기억을 떠올릴 일도 없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다시 그 기억이 떠올랐다. 아이가 나를 닮아 분리불안이 심했기 때문이다. 나를 이해하는 것이 곧 아이를 이해하는 일이었다.


나의 원가족은 사이가 좋다. 친정엄마가 나의 육아 멘토일만큼 엄마의 양육방식에 만족한다. 지금도 육아 고민을 수시로 나누는 사이다. 남동생과도 마찬가지다. 서로 허물없이 감정을 나눈다. 이런 나에게도 자라면서 상처가 있었을까?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육아에서 힘든 점이 있다면 먼저 내 과거를 돌아봐야 한다'


는 말은 여기저기서 들어봤지만 어떤 과거를 돌아봐야 할지 막연하기만 했다.


혹시 이런 것도 상처였을까? 나는 무슨 일이든 알아서 척척 해내는 의젓한 아이 었다. 엄마가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공부를 하고 가방과 준비물을 스스로 챙기는 손이 가지 않는 아이 었다. 연년생에 몸이 약한 남동생이 있었으니 더 그랬다. 엄마는 이런 나를 늘 칭찬했다.


"우리 큰 애는 알아서 다 잘해요. 내가 나무랄 것이 없다니까요. 얼마나 든든하고 의젓하지."


나는 그 칭찬을 듣는 것이 좋았고 점점 더 알아서 잘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불안과 걱정이 가득한 아이 었다. 그 불안을 들어낼 수가 없었다. 의젓한, 혼자서도 잘하는, 든든한. 이런 평가와 칭찬 속에 내가 숨겨야 했던 진짜 모습은 불안, 두려움, 투정, 응석 같은 것이었다. 아이 때 당연히 누렸어야 할 아이다운 모습을 난 충분히 누리고 살지 못했다. 아이를 외동으로 키우고자 한 것도 어쩌면 나의 결핍 때문이었다. 첫째라서 은연중에 강요하게 될 의젓함이 싫었다.


다행히 내 상처는 육아를 하며 많이 치유되었다. 친정엄마는 육아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셨다. 마음껏 응석을 부렸다.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어릴 때는 내가 동생을 챙겨주었다면 아이를 낳고는 반대로 동생이 나를 살뜰하게 챙겼다. 그 과정에서 어렸을 때 채우지 못한 결핍은 모두 메꾸어졌다. 어느 순간 이제는 원가족을 떠나 '진짜 독립'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 보면 말이다.


불안한 아이와 엄마의 상호작용


육아는 최고의 자아성찰이다. 어린 시절 나에게 스스로 말해주었다. 대견하고 장하다고.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너는 잘해왔다고 말해주었다. 이제는 힘들 때는 힘들다고 말하라고 도움을 청하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신기하게도 그 후에는 아이를 도와줄 용기가 생겼다.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환경, 모르는 사람이 불안한 아이. 어디 가도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내 품을 떠나지 못하는 아이가 늘 걱정이었다.


‘이래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엄마가 아이를 불안의 시선으로 바라보니 아이는 더 불안해졌다. 아이 스스로 자기를 불안한 아이로 만들었다. 세상에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엄마가 아이를 불안하게 바라보니 그럴 수밖에.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로 했다. 더 이상 불안한 눈으로 아이를 보지 않기로 했다.


불안과 마주했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나와 함께 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불안을 '다스리는'방법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그전까지 나는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을 미리 예측하고 플랜 A부터 Z까지를 모두 계획했다. 그래야 안심이 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모든 일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것은 불안을 이기는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없다. 나는 신이 아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일, 믿을만한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 그것이 내가 새로 배운 불안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아마 아이도 평생을 불안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타고난 기질은 잘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다짐한다.


나를 닮은 아이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언제든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어느 상황에서도 기꺼이 아이 편에 서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모가 되자.


그래서 아이가 불안에 압도되지 않고 그것을 다스리며 평생을 살 수 있게 돕자.


불안한 엄마라서 참 다행이다.



* 사진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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