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82년생 김지영>에는 아이 구구단을 가르치기 위해 서울대 공대를 나온 엄마와 아이 동화책 읽어주기 위해 연극을 전공한 엄마가 나온다. 고학력 전업주부를 빗대어 한 우스갯소리다. 하지만 그냥 웃고 지나쳐지지 않는다. 그럼 언론학을 전공한 나는 아이를 위해 글쓰기라도 가르쳐야 하는 것일까? 엄마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그냥 삼시세끼 밥만 챙겨주고 시간 맞춰 유치원에 보내는 것만으로도 지친다. 엄마만 하고 싶다.
6세, '교육'에 눈을 뜨는 시기
울지 않고 등원만 해도 고맙던 5세가 지나갔다. 교육열이 높은 동네가 아닌데도 미술, 태권도, 피아노, 인라인 같은 예체능부터 사고력 수학, 어학원까지 본격적으로 학원에 가는 아이들이 많아졌다. 영어학원 가방을 메고 지나가는 또래들에게 눈길이 갔다. 단지에 들어오는 영어학원 차량 이름을 나도 모르게 외우고 있었다. 엄마들과의 대화에서도 본격적으로 교육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한글 떼기 고민부터 영어학원은 어디가 좋다는 이야기, 수학은 사고력을 꼭 해야 한다는 조언 등이 쏟아졌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흔들리지 않을 엄마가 있을까? 학원을 보내기에는 아직 어리다고 생각하면서도 보내면 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속이 쓰려 견딜 수가 없었다.
학원 후기를 들으며 속이 쓰렸던 건 솔직히 ‘돈’ 때문이었다. 사립유치원이나 영어유치원의 원비를 감당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학원비까지. 그들이 가진 경제력이 부러웠다. 월급은 매달 똑같고 아이 학원을 보내려면 지금 쓰는 돈 어딘가에서는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어디에서 줄여야 할지 계산기를 아무리 두드려도 답이 안 보인다.
'남편 연봉이 얼마인 거야? 재산이라도 물려받았나? 내가 너무 알뜰하지 못한 걸까? 아니면 재테크?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돈이라도 벌었나?'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 아이는 학비가 거의 들지 않는 국공립유치원을 다니고 있었다. 교육방향이 ‘놀이중심’으로 바뀌면서 국공립에서는 일체의 교육을 하지 않았다. 한글 떼기도 엄마 몫이었다. 그런데도 배짱 좋게 학원 하나 보내지 않고 있으니 그 사람들 눈에는 되려 내가 한심하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원 한 아이를 붙잡고
“후야 너도 학원 한번 가볼래?”
물었더니 대답은 들으나 마나
“아니”하고 돌아온다.
아이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지 불안해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새로운 고민이 시작됐다. 육아는 고민과 선택의 연속이다.
'엄마표 공부' , 선생님이 돼야 하는 걸까?
학원을 보내는 엄마들과는 잠시 담을 쌓고 지내기로 했다. 그게 정신건강에 좋았다.대신 아이가 유치원에 간 사이 도서관으로 향했다. 아이 교육과 관련된 책을 잔뜩 쌓아놓고 읽었다. 유튜브에 접속했다. ‘교육’, ‘엄마표’, ‘영어’, ‘한글 떼기’ 등의 키워드를 검색했다. 엄마들의 고민을 반영한 듯 교육 채널도 상당히 많았다. 그중 몇 가지를 골라 구독했다. 채널에 올라온 영상들을 둘러보고 댓글도 꼼꼼히 살폈다. 유튜브는 나보다 먼저 초등학교를 보낸 엄마들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댓글에 그들의 고민과 후회가 모두 담겨있었다. 내가 구독했던 채널의 성격 때문인지 몰라도 선배 엄마들이 입을 모아 강조하는 것은 ‘독서’와 ‘영어 노출’이었다. 지금은 많이 놀리고 ‘독서’와 ‘영어’만 시작해도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안심이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엄마표를 하게 된 계기 역시 거창한 교육관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그것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아이는 학원을 거부했고 오히려 나는 그게 고마웠다. 아이가 당장 학원을 가고 싶다고 하면 내가 발레학원을 그만두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기적인 엄마가 분명하다. 아이 학원비를 아껴 내 발레 학원비를 내고 싶었다.
하지만 불안했다. 학원을 안 보내는 대신 뭐라도 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엄마표였다. 경제적 여유가 있고 아이도 적극적이었다면 엄마표를 선택했을까? 알 수 없다.
엄마표라고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갑자기 어깨 힘 딱 주고 책상에 앉아 문제집을 풀게 할 자신은 없었다. 힘 빼고 최소한만 하기로 했다. 학교 갈 때까지 '독서'와 '영어 노출' 두 가지만 지속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리하여 시작된 엄마표 독서와 영어. 엄마표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울 정도만 했다. 아이가 당장 공부를 잘하길 바라서 시작한 엄마표가 아니었다. 내가 불안하지 않으려고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래서 최대한 힘을 뺐다. 잘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하는 것이 목표였으니까. 수많은 엄마표 영어 성공기나 책육아 후기를 담은 도서들은 일부러 보지 않았다. 책 속에 있는 엄마들처럼 최선을 다 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로드맵이나 추천도서목록을 참고하는 정도로만 봤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딱 두 가지로 정했다. 욕심부리지 않았다.
1. 잠자리 한글 & 영어 독서
2. 영어 영상 노출
독서는 자기 전에 읽어주는 것이 전부였고 영어는 영상 보는 것과 책 읽어주는 것이 끝이었다. 그냥 그걸로 내가 오늘 할 일은 다했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청개구리 같은 구석이 있어서 엄마가 결의에 차 있으면 오히려 뒷걸음질 친다.
“오늘부터 한글 영상은 금지야, 영어 영상만 봐!” 했으면 거부했을 텐데 한글 영상 실컷 보고 꺼야 할 타이밍에 “아쉬우면 이거라도 볼래?” 하며 영어 영상을 내미니 아이도 마지못해 봤다. 자지 않으려는 아이를 붙잡고 누가 이기나 보자는 심정으로 10권이고 20권이고 매일 밤 읽어줬다. 아이가 특히 좋아했던 ‘바바파파’ 나 ‘EQ의 천재들’ 시리즈는 안 보고도 외울 정도가 됐다.
어느 날 EQ의 천재들 캐릭터 이름을 하나둘씩 스스로 읽기 시작했다. 때가 왔다 싶어 한글 워크북을 내밀고 기억, 니은을 외치니 잘 읽던 글씨를 더 이상 읽지 않았다. 책을 덮었다. 학습지 선생님을 불렀지만 연필을 들고 순서에 맞춰 쓰는 것을 너무 싫어했다. 한 달만에 그만두었다. 노트와 연필만 준비해두고 스스로 쓰고 싶은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나마 독서라도 하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견뎠다.
영어는 더 어려웠다. 이런저런 책을 들이밀어보아도 별로 흥미가 없었다. 영어책 한 권 읽어야 좋아하는 한글책도 읽어주겠다고 하고는 읽는데 30초도 걸리지 않는 짧은 책부터 매일 읽어줬다. 한글을 뗄 때 그랬듯 어느 날 '디...스...이~' 하고 소리를 내어 읽길래 파닉스 책을 내밀었다. 아이는 다시 입을 닫았고 책은 훗날을 위해 고이 넣어두었다. 그렇게 2년을 했다. 잘 하지는 못해도 꾸준히 했다.
7세, 엄마표고민은 계속된다
초등 입학이 1년도 남지 않았다. 막상 학교 입학을 앞두고 보니 여유롭게 '이거면 됐다'가 잘 안된다. 이제 겨우 자기 이름 석자를 쓰는 아이를 두고 벌써부터 고민이 깊다. 어쩔 수 없어 시작한 엄마표를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또 어디까지 엄마가 해야 하는 건지도 막막하다. 어학원에 다니는 아이는 더 많이 보이기 시작하고 유명 체인 학원의 간판들이 눈에 더 잘 띈다. 아이는 그런 친구들을 보고도 학원은 안가겠다고 버티고 있지만 막상 아이가 가겠다고 발 벗고 나선다한들 다 보내줄 수 있는 능력도 없다.
아이 이름의 청약통장 잔액을 확인했다. 아이가 어릴 때 어른들이 주시는 용돈이라도 모아두자는 생각으로 만든 통장이다. 적지 않은 액수라 생각했는데 사교육비와 비교해보니 턱도 없는 액수다. 아무래도 엄마표는 운명이다 싶어 계속해서 정보를 모은다. 글쓰기니 발레니 이런 배부른 소리는 당장 집어치우고 아르바이트라도 알아보는 게 남는 장사일까? 그 삶을 행복하게 받아들일 자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