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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이 Jul 13. 2022

그냥 버티는 거야

첫 직장에서 만난 10년 차 선배는 회사생활을 힘들어하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냥 버텨. 버티는 게 이기는 거야."


난 그 말이 듣기 싫었다.

'싫은데 왜 버티라는 거야. 그거 그냥 현실에 안주하라는 뜻 아니야?' 혈기왕성한 나에게 무조건 버티라는 말은 숨이 막혔다.


첫 번째 회사를 퇴사하고 꿈에 그리던 두 번째 회사에 입사했을 때 여기나 거기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았다. 야근이 없는 대신 주말근무를 해야 했고 불필요한 문서작업이 없는 대신 회의가 많았다. 연봉은 조금 올랐지만 그만큼 일이 많아졌고 복지가 잘 되어있었지만 휴가 쓰는 걸 눈치 주는 상사가 있었다.


멀리서 볼 때는 좋아 보이기만 했는데 막상 그 안에 들어와 보니 별 거 없었다. 10년 차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버티라는 말.


도망치는 것이 습관이 될까 봐 두 번째 회사에서는 5년을 버텼다. 그때 나와 함께 상사를 욕하던 사람은 그 이후로도 8년을 더 버텨 팀장이 됐다. 팀장이 된 이후에도 가끔 나에게 상사 욕을 할 때면 더 이상 그녀의 말에 동조할 수가 없었다. 버티지 못한 내가 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아주 예전에 본 일본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평생을 한 직장에서 일해 온 아버지는 수시로 회사를 그만두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회는 만만한 곳이 아니다. 너는 네가 그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네가 그 회사에서 걸러진 것이다."  

일본 드라마 <프리타 집을 사다> 중에서


정말 그럴까. 버티는 게 이기는 거였을까? 버티는 게 이기는 거라던 선배가 한 말의 진짜 뜻은 무엇이었을까.


짐작컨대 버티라는 말은 부당한 대우를 참으라는 뜻이 아니라 슬럼프, 그 고비의 시간을 견디라는 뜻이었으리라. 8년을 더 버틴 그녀에게 팀장 자리를 준 것은 슬럼프의 시간을 견딘 것에 대한 보상이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설렁탕 먹으러 갔을 때 생각해보자. 처음에는 국물이 너무 뜨거워서 무슨 맛인지도 잘 모르고 먹는다. 그러다 한 김 식고 나면 그제야 진짜 맛을 알 수 있다. 비렸는지 상했는지 간이 맞는지 그때 알 수 있다.


사람도 비슷하다. 뜨겁게 타오를 때, 열정이 넘칠 때는 누가 진짜인지 알기 어렵다. 누구나 다 열심히 하니까. 하지만 열정 넘치는 그때는 지나 한 김 식었을 때 그때 여전히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진짜다. 뜨겁게 타오르다 쉬이 식지 말고 천천히 따끈하게 오래가는 게 진짜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빠른 결과를 기대하지 않고 묵묵히 천천히 계속해서 걸어가야겠다. 꿈도. 취미도. 슬럼프는 결국 근근이 버티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사진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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