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딩 인생
‘7세 고시’라는 키워드가
한창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무렵,
올 초 방영된 드라마 라이딩 인생이
현실적인 소재로 많은 공감을 얻었다고 한다.
경쟁에 내몰리는 아이들,
그리고 그 뒤에서 더 치열한 하루를 살아가는 부모들.
그 속에서 드라마가 던진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결국 ‘행복’이었다.
아직 그 드라마를 보진 못했지만
요즘 따라 문득문득 생각난다.
진짜 중요한 게 뭘까.
지금 우리가 애써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미국에 와서,
교육이란 무엇인지, 가족이란 무엇인지
삶의 방향에 대해
조금씩 생각의 결이 달라지고 있다.
결국 모든 질문의 끝은
‘행복’이라는 단어로 수렴된다.
미국에서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정말이지, ‘라이딩 인생’이다.
그런데 한국처럼
‘학원 셔틀’로 내몰리는 그런 의미는 아니다.
미국에선 학교마저 걸어 다닐 수 없기에
차로 태워 보내고, 또 데리러 가는 것이
삶의 한 부분이고, 현실 그 자체인 것이다.
미국 초등학교에는
‘드라이브쓰루’ 시스템이 있다.
유치원 시절엔
엄마가 직접 교실 앞까지 아이를 데려다주고
담임 선생님과 보조 선생님에게
정식으로 인계해야 한다.
하교 시간에도 마찬가지.
부모의 얼굴을 확인한 뒤
아이를 한 명씩 내어 보낸다.
그러다 1학년이 되면
드라이브쓰루를 통해
아이가 스스로 등·하교할 수 있게 된다.
드라이브쓰루는 학교 정문 가까이
안전하게 설계된 진입구에 마련돼 있어,
엄마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도
아이를 안전하게 태우고 내릴 수 있다.
미국 육아는 말 그대로,
라이딩 인생.
오늘도 내 하루는
아이를 태우고,
내리고,
다시 태우고,
또 내리는,
정신없는
주재원 와이프의 일상 속에서 흘러간다.
그 누구도
미국에 간다고 했을 때
‘도시락’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아이의 언어 걱정,
내 커리어 걱정,
이삿짐 정리 걱정…
걱정만 해도 삼만 가지는 족히 됐는데
그 안에 ‘도시락’이라는 항목은
애초에 들어 있지 않았다.
도시락과 간식,
그리고 매 끼니 집밥까지
전부 손으로 해내야 하는 나날들.
한국에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풍경이
이제 내 하루의 기본값이 되었다.
미국 공립학교에도 급식은 있다.
하지만 그 퀄리티란…
한 입 베어 문 우리 아들은
단칼에 잘라 말했다.
“엄마, 나 밥이 좋아.”
신토불이 입맛,
‘밥심’으로 하루를 버티는 우리 아이에겐
도시락이 당연한 선택이었다.
게다가 미국 초등학교의 등교 시간은
아침 7시 50분.
도시락을 싸기 위해선
더 일찍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
아이 도시락 하나도 빠듯한데,
남편까지 도시락이 필요하단다.
한국의 대기업에는
어디나 지하에 구내식당이 있어
점심 걱정이 없었지만,
해외지사는 다르다.
매 끼니 차를 몰고 나가
20불 가까이 써야 하는 현실 속에서
도시락은 가장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선택.
그래서 나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매일 아침
도시락 두 개를 준비한다.
도시락뿐만 아니다.
물가 높은 미국에서는
간식도, 집밥도
전부 직접 만들어야 한다.
환율 생각하면
배달음식, 외식은
한 끼가 아닌 ‘한 방’이다.
아이가 학교에 가면
그날 간식, 저녁, 다음 날 도시락까지
미리 장을 보고 준비해야 하고,
어질러진 집을 정리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다 보면
오전 시간은 정말 쏜살같이 지나간다.
게다가 미국의 집은
공간이 넓은 만큼
할 일도 많다.
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때는
일을 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내 안에 열정이 남아 있었다.
하루 4시간 반씩 ESL 수업을 들으며
시간을 꽉 채웠다.
하지만 아이는 2시면 하원,
수요일은 minimum day라
정오 무렵 돌아온다.
그래서 오후 12시까지 수업을 듣고 나면
그 후는 말 그대로
전쟁이다.
하교한 아이와 하루 종일
집에만 있을 수는 없다.
도서관에 갔다 오고,
팀 스포츠도 하고,
구몬도 보내고,
친구들과 playdate도 한다.
그 모든 활동마다
엄마는 당연히 운전대에 앉는다.
그 와중에도 틈틈이
한국 가족들과 연락하고,
오전에 다 못 본 장을 보고,
다시 집에 들어오면
어느새 해가 진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른 채
시계를 보면 6시, 7시.
아이와 친구 집에서 놀다 들어온 날이면
8시, 9시가 되기도 한다.
회사 다닐 때보다 더 바쁘고,
더 분주한 하루를 보내면서도
오늘의 ‘성과’를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 없어
문득 허탈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운전 중 문득 올려다본
야자수 나무 너머의 파란 하늘,
구름 한 점 없는 캘리포니아의 햇살 속에서
내 마음은 탁 트인다.
아이와 하루 종일 부대끼며
소곤소곤 조잘거리는 일상 속,
“엄마, 나 요즘 행복해”라는 말이 들려올 때면
비로소 깨닫는다.
오늘의 성적표는 S,
아니 그 이상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