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일터로 나가고 싶어졌다

관성의 끝에서, 다시 커리어를 그리다

by 기록가 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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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오기 전에도, 그리고 온 후에도
많은 이들이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 커리어, 퇴사하기엔 아깝지 않아?”

사실, 나도 잘 몰랐다.


마음의 방향을 정하지 못한 채

LA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그럴듯한 명분으로

"2년 육아휴직" 카드를 꺼냈다.

감사하게도 회사는 받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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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회사에는 '2년 육아휴직' 제도가 없다.
법정 1년 외에는, 복지 차원으로

규정하는 바가 회사마다 다르다.


우리는 사내부부도 아니었기에
‘동반 파견 휴직’ 같은 고급 제도는

애초에 해당이 없었다.


그렇게 주어진 2년은

놀랄 만큼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기러기 부부는 피하고 싶다.
그렇다고 내 돈 들여

석사 과정을 밟고 싶지도 않았다.


‘석사휴직’이 생겼다지만,

그걸 휴직 연장의 꼼수로 쓰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일까. 퇴사라는 단어가,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인들에게 슬며시 흘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는 ‘커리어우먼’이라기보다는
가정과 아이를 아끼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회사를 15년 가까이 다닌 것도,
야망 때문이 아닌 관성이었다.


정해진 틀 안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데 익숙했고,
그 틀을 벗어나고픈 욕망은 딱히 없었다.


하지만 ‘진짜 마음’이라는 건
대개 이렇게 불쑥 찾아온다.
그리고 때론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급발진한다.




오랫동안 눌러왔던 감정은
어느 날, 아주 예고 없이 터져버리곤 한다.


그날 밤이 그랬다.
아이와 남편이 잠든 고요한 시간,
조용히 맥주 한 캔을 따고
홀린 듯 지금 회사의 채용 페이지를 열었다.


마침,
B2B 마케팅에서 B2C로 넘어가 보고 싶다는
갈증이 짙어지던 시점이었다.
기회란 건 늘 그렇다.
기척도 없이, 불쑥 문을 두드린다.


그날 밤,
키보드를 두드리며 새벽을 보냈다.
사실은 본부장 보고자료 마감으로
정신없던 날이었는데,
그 모든 걸 잠시 내려두고
내 이직에 집중했다.


왜였을까.
그날은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리고 그 ‘그냥’이
나를 지금 이 자리까지 데려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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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도 비슷한 감정이 스쳐갔다.
“그래, 2년이 끝나면 다시 일해야겠다.”


그 생각이 들자, 무심결에
지금 회사의 미주법인 채용공고를 검색했다.


놀랍게도 익숙한 업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보고서 작성, 대행사 관리, 예산 편성
바로 내가 오랫동안 몸에 익혀온 일들이었다.


그 순간, 문득 생각했다.
복직 대신 이곳에서

커리어를 이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당장 퇴직을 결심한 것도,
취업 준비에 돌입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조심스레,
그 가능성의 문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물론 현실은 간단하지 않다.
‘퇴사 후 현채인 전환’이라는 건
생각처럼 쉽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서류 전형부터 면접까지
모든 과정을 다시 거쳐야 한다.


그저 지금은,
가능성의 탐색이자 생각의 초입에 서 있을 뿐이다.




예전 해외 전시를 담당하던 시절,
주재원들과 나눈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현채인요? 잘 뽑기 하늘의 별 따기예요.”

그 말에는 이유가 있다.


한국 정서에 익숙하지 않으면
작은 오해도 곧장 큰 사건으로 번지기 쉽다.
신고, 퇴사, 소송이라는 '삼종 콤보'가
의외로 자주 발생한다.


어찌 보면 그만큼 미국의 노동법이
개인을 더 철저히 보호하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반면, 보수적인 한국 기업에서 일하려면
‘한국 물’이 어느 정도 배어 있어야
덜 삐걱거리며 굴러가는 게 현실이다.


사실, 미국 기업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다.
특히 보수적인 업종,

예컨대 완성차 산업에서는
Executive급으로 올라갈수록
한국 조직문화와 유사한 풍경이 펼쳐진다.


자정 무렵에도 메일이 오가고,
"Tech Night", "Supplier Night" 같은 행사명으로
실질적인 회식이 이어진다.
표현만 다를 뿐, 그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결국 열심히 굴러야 한다.
특히 규모 있는 조직이라면, 그건 불문율에 가깝다.


차이가 있다면 방식이다.

미국은 아랫직급일수록

‘내 일만 하면 된다’는 선이 명확하고,

문제가 생기면 곧장 법으로 해결하는 문화가 강하다.


한국은 반대로

‘책임’이라는 단어가 아랫사람에게도 강요된다.

묵묵히 버티는 사람이 손해를 보기도 하고,

그래도 조직이 돌아가게 만드는 건

그런 사람들 덕일 때가 많다.


결국, 덜 힘든 곳은 없다.

사람은 어디서든 굴러야 한다.

단지, 굴러야 하는 각도와 마찰력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예전 회사 시절, 『세이노의 가르침』 속
한 페이지를 사진으로 남겨둔 걸 보면,
나도 모르게 ‘꼰대력’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야근을 미화하지는 않았지만,
필요할 땐 엉덩이를 붙이고
노트북을 챙겨 집으로 돌아가는 게
당연하다고 믿었다.


주어진 시간엔 진짜 일을 하자는 태도만큼은
그때나 지금이나 흔들린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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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며칠 전,
조용히 따낸 맥주 한 캔이
문득 '열심히 달리던 나'를 떠오르게 했다.


그 시절의 공기, 감정,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끝의 감각까지
모든 게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건 단지,
오래 일해왔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라는
관성의 신호였을까?

아니면,
일을 하는 나로 다시 서고 싶다는
내면의 목소리였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회사원’은 장소에 상관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예전엔 늘 이렇게 생각했다.
“회사 나가면 난 뭐 하지?”
“회사 나오면 인생 끝이겠지.”


그런데 의외로
‘회사원’이라는 직업은 글로벌 스탠더드였다.
(웃프지만, 진짜다.)


한국에서 변호사나 변리사로 일하던 이들도
미국에선 라이선스가 없으면 다시 시작이다.
그에 비하면, 회사원은 꽤 유연한 직업이었다.




나는 늘 한 우물을 파는 사람이라
갑자기 미용사나 교사로 변신하는 건 어렵다.
그저 내 관성대로, 또 하나의 커리어를 그릴뿐이다.


물론 이 생각도 연말엔 바뀔 수 있다.
그때의 환경과 감정에 따라
또 다른 방향이 보일지도 모른다.




어릴 땐
이거 아니면 안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며 알게 된다.
단기 플랜은 쓸모 있고,
장기 플랜은 대개 웃음만 남긴다는 걸.


정권 하나 바뀌면 경제가 흔들리고
기업에서 세워둔 계획은 수정되고 수정된다.

그렇게 깨닫는다.
“아, 인생이란 게 이런 거구나.”




미국에 내가 있다는 것 자체도
애초에 인생 계획엔 없었다.


그래도 여기 있는 김에
영어는 ‘제대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이 덕분에 스몰톡은 일상이 됐고
요즘은 주식 뉴스를 들으며

경제 영어도 익히고 있다.


그래서 결심했다.
“영어가 안 돼서요”는 이제 그만.


예전에 토익 만점을 받았지만
미국에서의 영어는
그저 점수가 아닌, 실전이었다.


그래도 나는 외고 출신, 외국어 전공자.

기본기는 있다고 믿기에

조금만 다시 날개를 달면
날 수 있을 것이다 (?!)
(그리고 오늘도 나는 외쳐본다.

제발, 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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