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밖에 서서, 내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다
신나게 일하던 시절이 있었다.
일이 몰려서였고,
커리어적으로도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하우스 와이프가 꿈이에요’라며 징징대던 어느 날,
그 말이 이렇게 빠르게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나는 덜컥 주재원 와이프가 되었다.
처음 대기업에 들어갔을 때를 떠올리면
솔직히 답답하고, 조금은 칙칙하던 공기가 먼저 떠오른다.
사원 시절의 나는
회사 안에서 점점 희미해지는 느낌을 받았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다지 큰 책임을 지고 있던 것도 아니면서
괜히 스스로를 꽤 중요한 사람처럼 여기고 있었던 것 같다.
해외 영업 조직이었고,
주 3회는 기본인 술자리가 있었다.
술을 싫어하지도 않았지만
그 문화가 나에게 꼭 맞는 옷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업계는 지나치게 남성 중심이었고,
그 안에서 오래 버틸 수 있는 나의 미래는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차별’이라는 단어보다
‘지속 가능성’을 먼저 떠올렸다.
여성으로서,
그리고 언젠가 엄마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으로서
10년 뒤의 나를 상상해봤다.
아이 앞에 술 냄새를 풍기며
널브러져 있는 엄마의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최악이었다.
그렇게 이직을 결심했다.
여성으로서의 강점을 살릴 수 있는 일,
그리고 늘 마음 한편에 남아 있던
어학 전공자로서의 자존심을
다시 꺼내 들 수 있는 자리.
프랑스 공공기관의 한국 지사에서
홍보·마케팅이라는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시절은 꽤 행복했다.
불어를 쓸 수 있었고,
출장이 잦았으며,
국제 전시회를 담당하며
세계 산업 동향과 주요 기업들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기자, 기업, 정부기관 관계자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며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는 감각도 분명했다.
그때의 나는
일의 범위도, 시야도, 견문도
눈에 띄게 넓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나서야
제도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했다.
작은 조직은 분명 자유롭고 유연했다.
출근 시간도 느슨했고,
출장이나 식사에서도 재량이 있었다.
하지만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처럼
‘써야만 하는 제도’ 앞에서는
그 유연함이 늘 반갑지만은 않았다.
조직이 작다 보니
쓰지 않는 편이 더 낫지 않겠냐는 말을
돌려 듣게 되는 순간들도 있었고,
제도는 있었지만
그걸 온전히 누리기엔
분위기가 애매한 경우도 많았다.
그제서야
‘유연함’이라는 말 뒤에
가려진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제도라는 이름의 울타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다시 대기업으로 돌아왔을 때,
그곳은 전혀 다른 얼굴로 보였다.
예전에는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규정과 절차들이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안정감처럼 다가왔다.
택시 한 번을 타도,
식사 한 끼를 해도
모든 것이 증빙의 대상이 되는 구조.
번거롭긴 했지만
그만큼 기준이 분명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복지와 연봉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크게 느껴졌던 건
일의 스케일이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전시회와 학회,
글로벌 컨퍼런스에 참여하는 기회가
너무도 당연하게 주어졌다.
그 안에서 나는
회사라는 울타리가 만들어주는
경험의 크기를 새삼 실감하게 됐다.
여러 조직과 긴밀하게 협업하며
조직 전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배웠고,
홍보라는 역할 특성상
말 한마디, 문장 하나가
얼마나 큰 파장을 만들어내는지도
매일같이 체감했다.
예산 규모가 커질수록
책임 역시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컨설팅사와 함께
전략과 브랜딩을 고민하며 일했던 시간들은
나에게 꽤 큰 자극이 됐다.
나보다 앞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을 한다는 건
긴장을 요구했지만,
그만큼 나를 성장하게 만들었다.
예전에는 ‘보고에 미친 조직’이라며
대기업 문화를 가볍게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 보고가
누군가의 판단과 책임을 대신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 겪고 나서야 알게 됐다.
보고는 통제라기보다
결정의 흔적이었고,
그래서 더 치열해야 했다.
나는 한 번 그 옷을 벗어본 사람이었고,
그래서 다시 입었을 때
그 온도가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점에
나는 덜컥 주재원 와이프가 되었다.
회사가 싫어졌던 것도,
일이 지겨워졌던 것도 아니었다.
물론 바쁘긴 했다.
요즘은 야근이 줄었다고들 하지만
나는 일을 많이 하는 편이었고,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일이 몰리는 구조 안에 있었다.
지쳐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가끔은 전업으로 사는 삶이
부러웠던 순간도 있었다.
그래서 외국에서의 전업 생활은
처음엔 꽤 그럴듯해 보였다.
넓은 집,
느린 일상,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되는 삶.
마치 오래 사귄 연인보다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사람이
더 반짝여 보이는 것처럼.
하지만 그 설렘은 오래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딱 1년쯤이었다.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고,
일에서 완전히 떨어져 보니
이전의 내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아등바등 살았던 시간,
하지만 그 안에 분명히 있었던 성장과 의미,
그리고 내가 속해 있던
따뜻한 울타리 말이다.
요즘 나는
잔디가 잘 깎인 골프장 옆
2층집에서 에스프레소를 내려 마신다.
잠시나마
작가라도 된 것처럼
꿈과 희망에 취해보는 시간이다.
주재원 가족이라는 건
어쩌면 최고의 회사 복지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울타리 안에
지금도 남편은 여전히 서 있다.
내가 대기업이라는 조직의 온기를
이토록 또렷하게 느끼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여유가
영원하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부임 기간이 끝나는 순간,
이 집과 파란 하늘,
시간의 여백은
신기루처럼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 시간을
지나가는 봄처럼 받아들인다.
앞으로 만나게 될
무수한 계절들을 위해,
지금은
바람의 방향을 익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