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책임의 무게를 가까이에서 보며 알게 된 것들

by 기록가 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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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대기업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하나의 미담처럼 소비된다.


대기업은 종종
답답하고, 비효율적이고,
머리 굳은 사람들만 남아 있는 곳으로 그려진다.


윗사람들은 멍청하고,
실무는 다 밑에서 하고,
대기업은 줘도 안 간다는 말들이
마치 하나의 공식처럼 반복된다.


하지만 대기업에서
오랜 시간 몸담아온 사람이라면 안다.


그곳은
일을 안 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는 곳이 아니라,
책임을 감당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
끝까지 버티는 자리라는 걸.




대기업에서 일한다는 건
생각보다 오래,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일이다.


왜 이 방향이어야 하는지,
왜 지금이 아닌지,
왜 이 선택이 최선인지.


사대리 시절의 나는
그 질문의 답이 이미 내 손에 있다고 믿었다.
실무를 하고 있었고,
Raw Data와 숫자를 직접 만지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윗선의 결정은
종종 이렇게 보였다.


느리고, 답답하고,
쓸데없는 일을 늘리는 것처럼.




하지만 시간이 지나
책임급이 되면서
보이는 풍경은 조금 달라졌다.


업무 특성상
임원과 조직 책임자들과
긴밀하게 일하게 되었고,
보고서가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라
의사결정의 재료라는 사실을
몸으로 알게 됐다.


윗선의 일은
실무를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의 선택이 가져올 리스크와 파장을 계산하고,
조직 전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가늠하며,
틀렸을 때 누가 책임질 것인지를
미리 고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결정은 느릴 수밖에 없고,
보고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보고가 길어지는 건
아무것도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특히 그렇다.

워라벨이라는 말이 일상이 되면서
팀원에게 야근을 시키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대신 그 부담은
고스란히 팀장에게 쌓인다.


위에서는 결과를 요구하고,
아래에서는 보호해야 할 사람들이 있고,
그 사이에서 팀장은
가장 많이 고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한다.


책임급이었던 나조차
회의에서 나온 말들이
집에 돌아와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아이를 재우며
다음 보고의 문장을 정리하곤 했다.


그렇다면
팀장과 임원이 짊어지는 무게는
얼마나 더 클까.


그건
게으른 사람의 풍경이 아니라,
책임이 있는 사람의 풍경에
더 가깝다.




사대리급에서
“내가 일을 다 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럽다.


실무의 대부분은
눈에 보이는 형태로
아래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실무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어디까지가 가능한지,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는
또 다른 층위의 고민이다.


그 결정들은
경험과 누적된 실패,
외부 자문과 조직의 히스토리 위에서
조심스럽게 만들어진다.


그 과정이 보이지 않으니
윗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래서 대기업은
얕볼 수 없는 조직이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늘 틀릴 가능성을 전제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틀림마저도
다음 선택의 재료로 삼으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그 구조 안에서
오래 일해온 사람들의 삶 역시
존중받아야 할 하나의 인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대기업을 미화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 안에서도
틀린 결정은 나오고,
실망스러운 순간도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조직 안에서
오래 일해온 사람들의 삶까지
가볍게 소비되는 건
조금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밤잠을 설치며
결정을 고민했고,
집에 돌아와서도
회사 일을 머릿속에서 내려놓지 못했던 시간들.


그 시간들이 쌓여
누군가는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이 된다.


그 이름이

조롱의 대상이 되기엔,

그 삶은 생각보다 훨씬 치열했고

그만큼 의미 있었다고

나는 믿는다.




대기업은
바보들의 조직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을 천천히 고르고,
그래서 결정을 쉽게 내리지 않는다.


그 구조 안에서
묵묵히 자기 몫을 해온 시간 역시
누군가의 인생이고,
충분히 존중받아야 할 삶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신, 외교부, 방송국 인턴을 거쳐
대기업과 외국계 공공기관에서 일하며
나는 대기업에서
가장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안에서
나는 분명히 치열하게 살았다.


이건
단 1~2년의 경험으로는
읽어낼 수 없는 서사이고,
그 시간을 통과하며
나는 나 스스로를 버틸 수 있는 사람으로
조금씩 단단해졌다.


사실 나는
그다지 강한 사람이 아니다.
나약하고, 쉽게 흔들리고,
자주 자신을 의심한다.


그런 내가 버텼다는 건,
버티다 보면
각자의 요령이 생기고,
자기만의 속도를 찾게 된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달리다가 잠시 멈추고,
멈춰 있다가 다시 달리고,
때로는 혼나면서 방향을 고쳐 가는 것.


아마도
회사에서의 삶이란
그렇게 계속
속도를 조절해 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대기업에서 보낸 그 시간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쩌면
그 시간 덕분에
나는 이 팍팍한 타지의 삶도
조금은 더 슬기롭게,
조금은 더 긴 호흡으로
살아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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