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와서 처음 느낀 기대감과 설렘

어서 와, 2026년

by 기록가 슈



미국 사대주의도 아니었고,
주재원 아내가 된다고 마냥 기뻐 들떠 있던 사람도 아니었기에,
미국에 와서 이런 감정을 느껴본 건 처음이다.


앞으로가 조금 기대된다는 생각,
그리고 아주 미세한 설렘.


지난 2년을 돌아보면
나는 늘 상황을 견디는 쪽에 가까웠다.
잘해보겠다는 마음보다는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래서인지 요즘 느끼는 이 기분이 아직은 조금 낯설다.




이사를 앞둔 집 안은 늘 어수선하다.
상자들이 거실 한쪽에 쌓여 있고,
버릴 것과 가져갈 것을 나누는 일이 반복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예전보다 훨씬 가볍다.


미신을 믿는 편은 아니지만,
이 집에서 보내온 지난 시간들이
이제는 정말로 끝나간다는 느낌이 든다.


정착을 비교적 빠르게 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곳에서 평생 겪지 않았을 법한 일들을
유난히 많이 겪고 버텨왔다는 마음도 함께 남아 있다.


나도 모르게,
이 집에는 수맥 같은 게 흐르는 건 아닐까
혼자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요즘 아이는 제법 잘 지내고 있다.
학교에서는 미국 *GATE 프로그램에 합격했고,
연초에는 Principal’s Award를 받았다.


*GATE : Gifted and Talented 약자로 캘리포니아에서 학업 성취도가 높은 학생들을 위해 제공되는

심화·확장형 교육 프로그램


미국에서는 상을 비교적 후하게 주는 문화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교장 선생님이 직접 아이를 불러
학업 성취도가 뛰어나다고 말해주었을 때는
부모로서 마음이 조금 놓였다.


미국에 온 지 1년 만에
ELPAC은 이미 opt out 되었고,
i-Ready 리딩과 수학 성적은
각각 상위 95퍼센트와 99퍼센트에 해당한다.


숫자로만 보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 모든 결과는
아이가 이곳에서 얼마나 애써왔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증표에 가깝다.


야구에서도 마찬가지다.
또래 중에서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AA 디비전에 들어가 뛰고 있다.


이번 트라이아웃을 앞두고
아이는 유난히 연습에 매달렸다.
그리고 당일, 타석에 선 아이는
모든 스윙을 안타로 연결했다.
타격 성공률은 100퍼센트였다.


나이순이라는 기준이 분명 존재하지만,
그날만큼은
아이의 나이보다
결과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아이의 미국 생활은
별 탈 없이 순조로워 보인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다.




그래서일까.
지금의 이 안정이,
더 늦기 전에 찾아온 것처럼 느껴진다.


이사를 결정한 일도,
학교를 옮기기로 한 선택도,
자연스럽게 관계의 거리를 다시 그어낸 일도
모두 한꺼번에 이루어진 변화는 아니었다.


다만 그때그때,
지금의 우리에게 가장 덜 무거운 쪽을 택했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무언가를 더 잘해보려 애썼다기보다는,
이제는 더 이상 버티지 않아도 되는 방향으로
조금씩 몸을 돌려온 시간에 가까웠다.




아이는 다행스럽게도
미국 생활이 제법 잘 맞는 것 같다.


물론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미국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상황을 투명하게 전달하고
필요할 때는 분명하게 speak up 하는 것이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이라는 걸
조금씩 배워가는 듯하다.


맞지 않는 친구와는
굳이 억지로 어울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도
자기 방식대로 익혀가고 있다.




아이는 유난히 도서관 시간을 좋아한다.
책에서 삶의 힌트를 얻는 편인 모양이다.


언젠가 아이가 내게 물었다.
“엄마, 싫은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아?”
그래서 나도 웃으며 되물었다.
“아니, 엄마도 너무 궁금한데?”


아이는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대답을 짧게 하면 돼.”


너무 당연한 말인데,
실제로 그렇게 해보니
굳이 어울리지 않아도 되는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갔다고 했다.


책에서 읽고 고개만 끄덕이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자기 삶에 그대로 적용해 본다는 점이
괜히 더 대견하게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내 주변에서 공부를 잘하던 아이들 역시
어릴 적에는
그리스·로마 신화나 삼국지 같은 이야기책과
만화책을 달고 살던 경우가 많았다.


독서의 형태보다 중요한 건,
이야기를 즐기고 오래 곁에 두는 힘이었다.


김은하 교수 역시
만화든 무엇이든 다양한 책을 많이 읽는 아이가
그만큼 다양한 어른으로 자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결국 중요한 건
어떤 책을 읽느냐보다
얼마나 많이, 얼마나 꾸준히 읽느냐일 것이다.




미국의 초등학교에서는

독서를 유난히 중요하게 여긴다.

과제를 빨리 끝내면
책을 읽을 수 있다고 하면,
아이들은 눈에 띄게 집중해서
자기 일을 끝낸다.


어릴 적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쉽게 보지 못했던 풍경이라
완전히 공감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아이를 지켜보며
이 환경만큼은 참 좋다고 느끼게 된다.




요즘 나 역시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아이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최근에는 투자 관련 책부터
심리학, 철학, 인문학까지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책들을
동시에 읽고 있다.


굉장히 물질적인 주제에서 시작해
어느새 쇼펜하우어로 흘러가는 이 흐름이
조금 낯설기도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지금의 나이기도 하다.


독서와 주식,
아이의 스케줄을 챙기는 일과
컬리지 공부,
그리고 대학원 준비까지 병행하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해가 져 있다.




이사를 2주쯤 앞두고
버릴 것을 버리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 와서 품었던 수많은 잡생각들,
의미를 붙이느라 애썼던 관계들,
그리고 끝내 내려놓기까지
수없이 고민했던 나 자신에 대해서.


버리고 없어지고
내 손을 떠나는 건 한순간인데,
그 과정 속에서는
수도 없이 요동치던 마음과
밤새 헤매던 순간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 결말이 야속하게 느껴지다가도,
결국 나를 지켜낸 건
나 자신이었다는 생각에 닿는다.




그래서 요즘 나는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모든 소용돌이 속에서도
나를 중심에 두고,
내가 어떻게 대응할지만 바라보면
많은 것들이 의외로 단순해진다는 것.


누가 나빴고,
어떤 상황이었고,
그래서 어떤 사람이나 직업,
어떤 생각이나 방식이 틀렸다고
굳이 규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이제는 알 것 같다.


모든 것에는
각자의 조건과 타이밍,
그리고 운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위에서
‘앞으로 나는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를
정하는 편이
훨씬 건강한 선택이라는 것도.




살다 보니
배알이 꼴리는 감정,
그러니까 자격지심이
사람을 얼마나 쉽게 날카롭게 만드는지도
자주 보게 된다.


농담처럼 건넨 말에도
상대의 위치나 상황을
굳이 깎아내려야만
마음이 놓이는 경우들.


그럴수록
그 말의 방향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향해 있다.


나는 이제
그 감정의 작동 방식을
굳이 가까이서 보지 않으려 한다.


대신,
내가 서 있는 자리와
내가 선택해온 과정에
조용히 집중하는 쪽을 택한다.


누군가는
되지 않을 거라는 전제 위에서
조언을 늘어놓고,
누군가는
가능성을 말하기보다
선부터 긋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말들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잘 흘러가고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이런 생각은,
결국 내 태도부터 바꾸게 만들었다.


사회생활을 오래 해오며
습관처럼 웃으며 추임새를 넣던 태도들이
의도치 않게
내 경계를 흐리게 만들었다는 걸 알게 됐다.


호의라고 건넸던 반응들이
누군가에게는
간섭과 조언을 계속 건네도 된다는
신호로 읽혔다는 것도.


그래서 이제는
모든 말에 반응하지 않기로 했다.
나와 생각이 다를 때

무표정으로 보답하기로,
또 관계에도 조금 더 보수적이기로.


그리고 만약
내가 속한 사회가 너무 불편하다면,
그 환경을 바꾸기 위해
내가 먼저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런 깨달음을
불혹이 가까워진 시점에 얻었다는 게
조금 늦은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제는
무엇을 더 증명하려 애쓰지 않고,
어디에 에너지를 쓰지 않을지를
분명히 선택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느낀 기대감과 설렘은,
아마도 이런 변화들 위에서
조용히 쌓여온 감정일 것이다.


어서 와,
20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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