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고참
벌써 3년 차 주재원 와이프라니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미국 땅을 밟고,
SSN을 발급받고,
운전면허를 새로 따고,
아이 학교를 등록시키며
마치 신입사원 연수를 받듯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 시간들이 어느새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모든 것이 낯설었고,
그래서 나는 조금 더 착하고, 조금 더 순하게
나의 색깔을 최대한 숨긴 채 살아왔다.
워킹맘에서 전업맘으로 바뀐 삶도
의외로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순수하고 어리숙한 시절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들러붙기 마련이다.
그걸 제대로 쳐내지 못한 나는
한동안 바운더리를 지키지 못한 채
엄마들 모임에 휩쓸려 다니며
꽤나 버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요즘에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그래서 2년을 흘려보낸 뒤
3년 차가 되어서야
나의 색깔을 다시 찾은 삶을 살고 있다.
이제는 정말 중반부에 들어섰고,
남은 후반부를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따라
나의 미국 생활 일기의 색깔도
자연스럽게 정해지리라 믿는다.
라이딩 인생 + 알파
라이딩이 여전히 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아이 하교 전까지의 시간만큼은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으로 채우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그 ‘알파’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쩌면 4할 정도까지는
치고 올라온 듯하다.
한국에서 늘 달리기만 하던 내가
잠시 숨을 고르는 흐름 속에서
이대로는 견디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무엇이든 남겨야겠다는 결심에 이르렀다.
그 결심은 무심코 찾아온 것 같았지만,
어쩌면 오래전부터
마음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었던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캘리포니아에서는 거주 2년이 지나면
커뮤니티 컬리지 수업을
아주 합리적인 비용으로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작년 가을 학기부터
커뮤니티 컬리지에서
마케팅 매니지먼트 과정을 밟고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무엇보다 ‘배움’이 주는 생동감을
다시 느끼게 해 준다는 점에서
이 시간은 내게 꽤나 소중하다.
알고 보니 욕망이었던 알파
커뮤니티 컬리지 수업을 시작한 이유는 단순했다.
영어 실력을 조금 더 끌어올리고,
언젠가 커리어를 다시 잇기 위한
최소한의 발판.
그런데 작년 말, 한국에 다녀온 이후
바람처럼 스며든 어떤 욕망이 있었다.
원래부터 그렇게까지 생각했던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나는 또
석사 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사실 전업맘이 된 것까지는 괜찮았다.
그 선택 자체가
나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미국의 한국 전업맘 세계에 발을 들인 뒤,
내가 몸담고 있는 이 ‘물’이
지독하게도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매일 남편과 아이의 삶에 과도하게 매몰되고,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부분까지 곱씹으며,
아이의 성과와 인생이
곧 나 자신의 성취처럼
소비되는 구조.
그건 아이를 사랑하는 일과는
분명 다른 문제였다.
의미 없이 반복되는 대화들,
너무 쉽게 굳어버린 관계들.
그 모든 것이
내가 속한 사회이자 위치라고 생각하는 순간,
몸이 먼저 거부 반응을 보였다.
그즈음 한국에 다녀왔고,
상무님의 말 한마디가
유난히 오래 남았다.
“이왕 미국에서 공부할 거면
UCLA나 UCI 같은 데서 해.”
별 의미 없이 던진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그 말이 묘하게 꽂혔다.
어쩌면 나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다시 한번 증명해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현실도 고려해야 한다.
남편은 늘 바쁘고,
지나치게 무리한 선택은
가정을 흔들 수 있다.
그래서 타협점을 찾았다.
어찌 되었든
‘미국 석사’라는 타이틀.
그래서 요즘의 나는
교수님과 직장 상사에게 추천서를 부탁하고,
학업계획서를 쓰며,
동시에 컬리지 봄학기 수업을 듣고 있다.
여전히 바쁘지만,
적어도 하루하루는
조금씩 다시
나의 색깔로 물들어가고 있다.
'좋은 엄마' 타이틀도 놓치고 싶지 않은 나
이쯤 되면
정말 욕심이 과한 건가 싶다.
사실 ‘좋은 엄마’의 정확한 정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나는,
아이의 일상 앞에서만큼은
가능한 한 진심으로 반응하고 싶다.
웬만하면 식사는 집밥으로 채우려 노력한다.
그렇다고 외식을 완전히 배제하거나
햄버거와 과자를 금기시하는
열혈 엄마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아이의 몸을 채우는 음식만큼은
조금 더 신경 쓰고 싶다.
그래서 도시락도
가능한 한 정성스럽게 싸준다.
등하교 길에는 늘 함께 걷는다.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기쁘거나 힘든 하루의 조각들에
동참하기 위해서다.
말이 많은 아이라 가끔은 버겁고,
끝없는 질문에
“모르겠어”라며 얼버무릴 때도 많지만,
그래도 하루에도 수십 번,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고
스스로를 다잡는다.
방과 후 활동은 주로 운동이라
라이딩도 많고 에너지 소모도 크다.
중간중간 간식을 챙기고,
미뤄둔 집안일을 처리하고,
운동 연습과 소셜 활동을 따라다니다 보면
하루는 정말 순식간에 지나간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아이가 샤워하는 사이
분주하게 저녁을 준비한다.
식탁에 앉아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대화는 이어진다.
이렇게 하루가 흘러가다 보면
아이는 하교 직후에는 떠올리지 못했던 일들도
어느 순간 갑자기 꺼내놓는다.
방과 후 활동의 에피소드가
이야기보따리처럼 풀어지다 보면
어느새 잠이 든다.
그리고 아이가 잠든 뒤에야
나의 반성이 시작된다.
오늘은 조금 더 집중해서 들어줄 걸,
귀찮은 티를 내지 말걸.
한 번에 안 듣는다고
목소리를 높이지 말걸.
꼭 나갈 때 돼서 챙긴다고,
내가 안 챙겨주면
하나씩 놓친다고
너무 나무라지 말걸.
아직 애인데..
못 해준 장면들만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좋은 엄마라는 타이틀을
놓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나는
그만큼 좋은 엄마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밤마다 아쉬움이
조금 더 짙어진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욕망을 가진 나와
좋은 엄마이고 싶은 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살고 있다.
엄마이기를 멈추지 않으면서,
나 자신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쪽으로.
3년 차 미국 주재원 와이프.
어찌 보면 그다지 달라진 것은 없지만,
나는 지금
나의 색깔을 다시 찾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