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후엔 할 일 산더미, 미국 생활의 단면

미국 집은 그냥 유지되지 않는다

by 기록가 슈




어제 캘리포니아에 폭우가 들이닥쳤다.


SoCal이라 불리는 Southern California는

1월과 2월이 우기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허리를 굽혀 야드를 정리하는 일이 잦아진다.

돌이켜보면 유난히 분주했던 2월의 기억은

늘 비와 함께였다.


밤새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쿵쿵, 둔탁한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뭐가 좀 날아다니겠지.’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 마당을 보는 순간,

그 ‘좀’이 아니었다.


수영장 선베드는 세 바퀴쯤 구른 듯 뒤집혀 있었고,

바비큐 그릴은 완전히 넘어져 부품이 분리돼 있었으며,

아이의 야구 연습용 플라스틱 공들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괜찮다.

다시 세우고, 다시 맞추면 된다.

살림살이는 원래 제자리로 돌려놓는 게 일이니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돌아와

조금 더 자세히 둘러보니

지붕에서 내려오던 케이블이

쓰러진 나무에 깔려 떨어져 있었다.



나무 한 그루도 아니고, 두 그루.


이쯤 되면 놀라야 할 텐데

이상하게도 패닉이 오지 않았다.

그저 “허허…” 하고 웃으며

빗물에 젖은 가지를 치우고 상황을 정리했다.


미국 생활 3년 차.

이쯤 되니 연차가 주는 여유인지,

아니면 단순한 체념인지

모를 침착함이 생겼다.


젖은 케이블은 위험할 수 있다기에

곧바로 에디슨에 전화를 걸었다.


“A tree fell and appears to have damaged a service line connected to the house.”


안전 이슈라며

스파크가 튀는지, 타는 냄새가 나는지 확인하라고 했다.

심각하면 911에 신고하라고도 덧붙였다.


다행히 두 시간 만에 점검 기사들이 도착했고

결론은,

전선이 아니라 인터넷 케이블이었다.


우리 랜선 인터넷도 안 쓰는데.


요즘 wireless 프로모션이 한창이라

최근 스펙트럼에서 버라이존으로 옮겼는데

이럴 때 보면 참 잘 바꿨다는 생각이 든다.

(스펙트럼이었으면 인터넷 끊겼을지도 모른다.)


에디슨 측에서는

늘어진 케이블을 돌돌 말아 옆에 두며

인터넷 문제는 스펙트럼에 연락하라고 했다.


그래도 하나 배웠다.

전선이 의심되면 주저 말고 에디슨에 전화할 것.




이제 남은 건 쓰러진 나무 처리.

집주인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잔가지와 낙엽을 모아

야드 가비지 통을 가득 채웠다.


마침 다음 날이 수거일이었다.

몸은 축축 처졌지만

이럴 때 일정이 맞아떨어지면

괜히 작은 성취감이 든다.



이사 온 직후부터 눈에 거슬리던

구멍 난 쓰레기통도

오늘에서야 교체 요청을 했다.

1년에 한 번은 무료라니,

이런 행정 시스템은 또 묘하게 합리적이다.




행정 처리, 야드 청소, 집 정리.

그 사이사이 나는 학생이다.


이번 학기 9학점.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오전 3~4시간은 공부에 몰입한다.



아직은 ‘엄마’의 비율이

‘학생’보다 크지만,

요리를 간결하게 줄이고

청소와 인테리어를 최소화하니

생각보다 버틸 만하다.


허덕이지만,

그 속에서 느껴지는 바쁨의 충만함이 있다.




요즘은 아이 학교 봉사도

조금 더 자주 가려고 한다.

주로 아트 봉사를 맡는데,

사실 채점이나 폴더 정리가 더 쉬워 보인다.

조용히 할 수 있으니까.


아트 시간엔 아이들이

“이거 어때요?”

“주말에 저 이런 일 있었어요!” 하며

작품과 이야기를 한꺼번에 쏟아낸다.


그 에너지가 사랑스럽지만

다녀오면 기가 쪽 빠진다.

당이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깨닫는다.

아, 나는 선생님 체질은 아니구나.




폭우가 지나간 날은

유난히 하루가 길다.


오늘 밤부터 또 비가 온다던데

2차 이슈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대비해 둬야겠다.


한국에 있었다면

폭우가 지나간 뒤

이렇게까지 할 일이 많았을까.


비가 오면

지붕을 걱정하고,

나무를 걱정하고,

케이블을 확인해야 하는 삶.


처음엔 버거웠지만

이제는 묵묵히 정리한다.


아마 한국에 돌아가

폭우 다음 날 할 일이 없다면

괜히 허전해질지도 모르겠다.


적응이란,

생각보다 깊게 스며드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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