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주재원 와이프, 이제 학생이라 불러줘

New 직함을 얻다

by 기록가 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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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간다고, 휴직을 하겠다고 회사에 말하던 날.
나는 이미 ‘주재원 와이프’가 되어 있었다.


예상과 달리 팀장님은 이렇게 말했다.
“좋은 기회예요. 커뮤니티 컬리지에서 1–2학점이라도 꼭 따오세요. 그 기록, 평생 갑니다.”


그 말은 어딘가에 저장되었지만,
낯선 땅에 정착하느라 허덕이던 나는 곧 잊어버렸다.
SSN을 받고, 거주 증빙을 모으고, 행정 절차에 번번이 막히며 몇 번 시도 끝에 포기했다.
모든 일에는 시기가 있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2년이 흐른 뒤,
요리와 육아로 채워진 하루 속에서
나는 더 이상 배우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성장이 멈춘 채로 ‘적응’만 하고 있는 나를 마주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그래서 작년 말,
나는 다시 학생이 되기로 했다.




15년의 커리어를 몇 개의 단어로 요약하면 이렇다.
마케팅, 광고 홍보, 전시 마케팅, 행사 기획, 그리고 디지털 마케팅.


커리어의 절반 이상을 해외 전시 현장에서 보냈다.

몸으로 부딪히는 현장이 익숙했고,
사람을 만나 설득하고 공간을 기획하는 일이 좋았다.


하지만 미국에 와보니 화두는 명확했다.
디지털 마케팅, 그리고 데이터.
감이 아니라 수치로 말하는 마케팅.
경험이 아니라 분석으로 설계하는 전략.


나는 그동안 ‘감’과 ‘짬바’로 잘 해왔다.
하지만 수치화된 정교함이 필요했다.

그래서 다시 마케팅을 배우기로 했다.


Introduction to Marketing,
Digital Marketing,
Principles of Advertising,
Digital Marketing Strategy and Execution…


과목 이름은 익숙했지만,
내용은 생각보다 날카로웠다.


막연히 “이건 잘 될 것 같다”고 말하던 순간들이
“왜 이 수치가 이렇게 움직였는가”를 설명해야 하는 과제가 되었다.
감으로 해오던 일을 근거로 설계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더 큰 변화는
‘시키는 사람’에서 ‘직접 하는 사람’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in-house에 오래 있다 보니
대행사에 맡기고 리뷰하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수업에서는 직접 영상을 만들고, 광고 카피를 쓰고,
기획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해야 했다.


내가 해오던 일을
다시 펼쳐 처음부터 체화하는 기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이제는 더 잘 시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 대행사들이 “일을 아는 광고주가 제일 무섭다”고 말하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거창한 목표가 있어서 공부를 시작한 건 아니다.
영어를 조금 더 잘하고 싶었고,
언젠가 다시 커리어를 이어갈 때
‘기록’으로 남을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어쩌면 공부보다 실리를 택한 셈이었다.


많은 주재원 가족들이 여행에 열광할 때
나는 현지 사회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싶었다.

주말은 아이의 스포츠 경기로 채워지고,
경기가 없는 날이면 근처 바다를 보러 가는 게 유일한 나들이였다.


그래서 더 미국에서 배우고 싶었다.


공부를 시작했을 뿐인데
외국 엄마들과의 거리도 조금씩 좁혀졌다.
주변에 모이는 사람도 달라졌다.
환경이 한 번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목표가 생겼다.

가방끈을 늘리고 싶다는 생각.


대기업에서 일하던 시절,
임원들의 이력을 보면 학위가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단순히 대기업에서의 롱런이 아니라,
100세 시대에 롱런하기 위한 준비처럼 보였다.


늘 학사에 머물러 있던 내 이력이
문득 아쉽게 느껴졌다.


새로운 도전이 극도로 무서운 나는
완전히 다른 길보다
내가 해오던 분야를 확장하는 선택을 택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시작했던 공부는
이제 석사 지원이라는 또 다른 목표로 이어지고 있다.


완벽한 로드맵은 없었다.
그저 70~80%쯤 준비되었다고 느낀 순간, 시작했을 뿐이다.
그런데 시작하고 나니, 다음 계단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재원 아내라는 직함은
지금의 나를 설명하는 말일 뿐,
앞으로의 나를 제한하는 말은 아니다.


한 걸음 내딛으면
그 다음 계단이 보인다.


나는 그 재미를 알아가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주재원 와이프이자,
학생이고,
다음 도전을 준비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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