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 있는 바티칸 민속박물관에는 조선시대 때 쓴 편지 한 통이 보관돼 있습니다. 가로 62cm 세로 38cm의 명주 천에 깨알처럼 작은 글씨로 1만 3천여 자를 적은 편지이지요. 한 행에 100여자씩, 122행을 적은 글자는 모두 한자인데,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진 것이 없습니다. 얇고 얇은 붓으로 얼마나 또박또박 썼는지 글쓴이의 정성에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천 조각을 빼곡하게 채운 이 편지가 어둡고 캄캄한 토굴 속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1801년 봄, 상복을 입은 사내 한 명이 제천 배론에 도착합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이상인’이라고 말했지만, 그의 진짜 이름은 황사영이었습니다. 16세에 진사에 합격해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온 나라에 수재로 알려진 인물이었지요. 그는 1790년 정약용의 큰 형인 정약현의 맏딸과 혼인을 합니다. 그 후 친지들을 통해 천주교에 대한 교리를 배우고 입교합니다. 황사영은 천주교만이 ‘세상을 구제하기 좋은 약’이라고 생각하며 출세가 보장되어 있는 과거시험도 치르지 않습니다.
1795년 주문모 신부에게 ‘알렉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후에는 명도회의 지도층이 되어 교회에 헌신합니다. 자신의 집을 명도회원들의 모임 장소로 내놓는가 하면, 신자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고, 만나는 이들에게 교리를 전하며 전교에 힘씁니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한 후, 대리청정을 하게 된 정순왕후가 천주교인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하자, 배론으로 몸을 피합니다. 그곳에서 김귀동이 자신의 집 근처에 파 준 토굴 속으로 들어가 생활하게 되지요. 그러나 황사영은 한 시도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주문모 신부님은 무사하신지, 함께 교리를 공부하고 복음을 나누던 교우들은 잡히지 않았는지 마음이 온 통 그들을 향해 있었을 테니까요.
고뇌에 차 있던 황사영은 배론에 함께 들어온 김한빈을 서울로 보내 박해상황을 알아오도록 합니다. 얼마 후, 서울에서 돌아 온 김한빈은 황사영에게 수많은 신자들의 죽음과 주문모 신부의 자수 소식을 전합니다. 그는 깊이 탄식하며 이 땅에 신앙의 자유가 뿌리내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합니다. 그리고 붓을 들어 편지를 쓰기로 결심합니다.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로 죽어간 사람들의 생애와 자신이 생각한 교회의 재건 방법을 적어 북경에 있는 주교에게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황사영은 연행사의 일행으로 북경에 갔다가 주교를 만나 서신을 전하기도 했던 황심 토마스의 이름으로 편지를 쓰기 시작합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자신보다 세 번이나 북경에 갔었고, 주교를 만나 서신을 전했던 황심을 중국 교회가 더 신뢰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먼저 주교님의 안부를 묻고, 조선 땅에서 벌어진 박해의 소식을 전합니다. 박해가 크게 일어나 그 화가 신부님께 미쳤고, 위기의 순간에 함께 의논할 스승도 형제도 없어 주교님께 호소한다며 박해의 전말을 전하지요.
황사영은 이 땅에서 이처럼 잔혹한 박해가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며, 이 박해가 끝난다고 해도 주님의 특별한 은총이 없으면 예수님의 이름이 이 나라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 탄식합니다. 이런 생각만으로 간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니, 부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도와달라고 눈물로 호소합니다. 그리고 꼼꼼하게 기록해두었을 동료들의 순교과정을 빠짐없이 편지에 적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천주를 믿기 시작했고, 어떻게 잡히고 순교했는지,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닌 신앙의 역사를 명주 천위에 새기지요.
황사영의 백서가 번역된 편지를 읽다보면, 절망 속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그가 보입니다. 함께 기도하던 신자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죽음으로 가는 길인 줄 알면서도 이 땅에 와 미사를 드리고 성사를 집전하던 주문모 신부의 삶을 생각하며 원통해하는 그가 말입니다. 그리고 천주의 이름이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될까봐 극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의 모습도 보입니다. 아마도 황사영은 자신이 쓰는 편지 한 통이 두려움 끝낼 희망이 되어 돌아오기를 꿈꾸었을 것입니다.
200년 전, 그가 남긴 편지를 읽으며 생각해봅니다. 만약에 지금 내 눈앞에 끔찍한 박해가 벌어지고, 내가 겨우 몸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어갔다면 나는 황사영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교회 안의 다양한 공동체에서 리더로 활동하던 내가 저 상황에 놓인다면,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아마도 저는 박해를 한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경찰서로 달려가 오늘부터 배교를 하겠다고 자백을 하고 올지도 모릅니다. 저에게는 아이들도 있고, 연로한 부모님이 계시니 눈에 보이지 않는 천주님은 오늘부터 믿지 않겠다고요.
그러나 황사영은 한 아이의 아버지이자, 남편이고 아들이었던 황사영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 거룩한 예수님의 이름이 지속되기를 꿈꾸며 자신이 모색한 방법을 명주 천위에 쓰고 또 썼지요. 어쩌면 그도 자신이 쓴 편지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발각되는 날에는 자신은 물론 온 가족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편지를 썼고, 안타깝게도 편지가 발각되어 능지처사를 당합니다. 살아있는 채로 팔과 다리, 어깨와 가슴이 차례로 잘리고, 심장을 찔린 뒤, 목이 잘리는 형벌이었습니다. 황사영이 쓴 편지 한 통은 남은 가족들에게 비운의 삶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아내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도로,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로 떠나 유배의 삶을 살게 되었지요.
하나 밖에 없는 목숨과 그보다 더 소중했을 가족보다 ‘천주’를 더 사랑했던 황사영. 그가 캄캄한 토굴에서 쓴 절절한 편지를 읽으며 내 신앙의 길이 되어준 그날의 순교자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어두운 토굴 같았던 교회를 위해 기꺼이 초 한 자루가 되어 준 황사영을 위해 기도합니다. ‘누가 저희를 위로해 주겠습니까?’라고 울부짖던 그를 부디 ‘천주’께서 위로해주시기를.
성베네딕도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9년 가을호에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