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3년 8월 10일, 중국에서 한 사제가 조선대목구장이 된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편지를 씁니다. 자신도 조선에 가고 싶다는 내용이었지요. 그는 신학생이던 1819년부터 조선에 대해 생각했고, 3년 전부터 그곳에 가기위해 준비를 해왔다며 자신의 생각이 하루아침에 결정된 것이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중국에서 선교를 하면서 추위에도 단련됐고, 한자도 잘 알기 때문에 조선의 선교사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강조하지요. 그리고 그는 자신을 조선으로 파견하는 권한을 갖고 있는 수도회의 장상과 자신의 편이 되어줄 동료 사제들에게도 편지를 씁니다. 어서 자기를 조선으로 보내달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청원하며 4년을 보낸 그는 드디어 조선의 선교사로 파견됩니다. 조선 땅을 밟지 못하고 중국에서 선종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뒤를 이어 제2대 조선대목구장이 된 것입니다. 로랑 조제프 마리 앵베르(Laurent Joseph Marie Imbert), 그는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사목하고 있는 조선을 향해 출발합니다.
앵베르 주교가 조선에 들어 온 것은 1837년 12월입니다. 중국 사천을 떠난 지 5개월여 만에 봉황성의 변문에서 정하상 바오로와 조신철 가롤로를 만나 함께 조선 땅을 밟습니다. 그리고 다시 열닷새를 걷고 또 걸어 12월 31일, 그토록 원했던 조선의 수도 한양에 도착하지요. 앵베르 주교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신자들과 만나 인사를 나누며, 자신을 무사히 조선에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교우촌을 다니며 사목하던 모방 신부를 만나 조선의 신자들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1801년에 있었던 박해처럼 큰 박해는 없지만, 여전히 조선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앵베르 주교는 마음을 다잡고, 조선말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조선의 언어를 배우는 게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부활대축일을 지낸 후에는 300여 명의 신자에게 고해성사를 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경기도에 퍼져 있는 교우촌을 다니며 신자들을 돌봅니다. 그리고 조선에 도착한지 1년이 되어 가던 1838년 11월 24일에 파리외방전교회에 편지를 쓰지요. 자신이 중국에서 조선까지 어떻게 왔는지, 만약에 다른 선교사가 조선에 오려면 어떤 방법을 쓰면 좋을지 알립니다. 그리고 조선에 와서 그동안 한 일들을 기록합니다. 1836년 1월, 모방 신부가 조선에 왔을 때 4,000명에 불과하던 신자가 9,000명으로 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지요. 그리고 신자들에게 대세의 중요성에 대해 가르쳐주고, 신자가 아닌 어린 아이들이 죽음을 맞이할 때 하느님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대세를 주는 방법을 알렸다고 기록합니다. 그 결과 9개월 동안 192명의 어린이 중에서 154명이 천국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고 알리지요. 앵베르 주교는 조선에서 있었던 일을 빼곡하게 적어 프랑스로 보냅니다.
앵베르 주교가 남긴 조선 관련 편지는 모두 28통입니다. 중국에 있을 때 조선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던 청원편지와 조선으로 파견된 후에 조선의 상황을 보고하며 쓴 편지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가 한참을 읽고 또 읽은 편지는 앵베르 주교가 프랑스외방전교회를 후원하는 회원들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중국에 있던 앵베르 주교가 조선으로 출발하기 전에 쓴 편지인데, 금전적인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 인사를 전하며 이제는 영적인 지원, 기도를 바쳐달라고 부탁하는 편지였지요. 어쩌면 너무 평범한 이 편지를 읽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이 편지를 받고 프랑스 어딘가에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가 앵베르 주교와 조선의 신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180년 전, 조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앵베르 주교가 보낸 편지를 읽고 두 손을 모아 기도했을 프랑스 신자들. 그들의 기도가 하늘에 닿아 우리 교회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그렇게 이어 내려온 가톨릭 신앙을 지금 내가 믿고 있다는 것이 감격스러웠거든요.
앵베르 주교는 조선 사람들에게 조선의 사제가 있어야 하고, 조선말로 된 기도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방 신부가 발탁한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신학생에 이어 정하상과 이재의 등 네 명을 발탁해 라틴어를 가르쳤지요. 그리고 누구나 쉽게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우리말 기도서를 만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조선 교회가 견고하게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나 그가 바란 열매가 맺히기 전에 앵베르 주교는 체포되고 맙니다. 배교자의 꼬임에 넘어간 신자가 앵베르 주교의 거처를 찾아가는 바람에 은신처가 발각되었고, 혹시 자신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박해 당할 것을 우려해 자수를 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관아로 가며 앵베르 주교는 교우촌을 순방하고 있는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에게 쪽지를 보내 자수 할 것을 권유합니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내용이었지요. 1839년 9월 21일, 앵베르 주교는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참수형을 당합니다.
앵베르 주교는 자신이 떠나도 조선교회가 끝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사목하는 동안 순교자들에 관한 자료를 모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훗날 이들이 성인품에 오를 수 있도록 자료들을 남긴 것이지요. 앵베르 주교의 기록은 그가 순교한 뒤, 현석문 가롤로, 현경련 베네딕타, 이문우 요한 등의 손을 거쳐 1841년에 <기해일기>로 엮입니다. 그리고 이 책을 시작으로 순교자들의 삶을 정리하는 일이 추진되지요. 그 덕분에 지금 우리가 그들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앵베르 주교가 남긴 편지들을 읽으며 생각해봅니다. 그는 무엇 때문에 죽을 줄 뻔히 아는 나라로 보내달라고 했을까, 무엇 때문에 이 나라에 와서 목숨을 내놓을까…. 그리고 결론을 내려봅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고. 그것이 아니면 설명될 수 없다고요. 로랑 조제프 마리 앵베르, 범세형 라우렌시오. 그가 이 나라에 뿌린 씨앗은 신앙보다 더 깊은 사랑이었습니다.
- 성베네딕도 왜관수도원 계간지 2019년 겨울호에 쓴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