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년 만에 전해진 비밀 편지

편지로 읽는 신앙2

by 편지큐레이터



1794년 12월 23일 밤.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 위를 걸어 조선으로 잠입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행여 다른 이들의 눈에 띌까, 숨소리도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조심하던 이들은 중국에서 몰래 파견한 선교사와 조선의 밀사였습니다. 조선 신자들의 편지를 받고 선교사를 파견하기로 한 구베아 주교는 조선인과 생김새가 비슷한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조선으로 파견합니다. 그는 조선교회의 밀사 지황과 함께 국경을 넘어 조선에 들어옵니다.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는 1795년 예수부활대축일에 신자들과 첫 미사를 함께 봉헌합니다. 그러나 얼마 후 신부가 조선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한 당국에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지요. 그는 황급히 여성 회장을 맡고 있던 강완숙 골롬바의 집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관아에서는 주문모 신부를 잡으려고 혈안이었지만 허사였습니다. 조선은 남녀가 유별한 사회였기 때문에 누구도 그가 여성의 집에 숨었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의 집에 숨어서 6년 동안이나 몰래 사목 활동을 이어갑니다. 그러던 1801년 2월, 책롱사건이 벌어지면서 조선교회에 피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순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던 정순왕후는 천주교를 아버지와 임금도 구분하지 못하는 요사스런 종교로 간주하고 금교령을 내립니다. 그리고 다섯 집을 하나로 묶어서 서로를 감시하게 만들죠. 감시망이 좁혀오자 평신도 단체 ‘명도회’의 회장이었던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집에 있던 성상과 교회 관련 문서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로 합니다. 그러나 이를 옮기던 도중에 포졸들의 불심검문에 걸려 발각되고 말지요. 이 일로 정약종과 권철신, 강완숙 등 교회의 지도층들이 붙잡혀 죽임을 당하고, 피신해있던 주문모 신부가 스스로 관아에 나가 순교하면서 조선교회는 깊은 절망 속에 빠져듭니다.


이 때, 조선교회의 절박한 상황을 편지로 써서 북경으로 보내려 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조선의 천재라고 불리던 황사영이었지요. 그는 16세 때 진사에 합격해 정조의 총애를 받고 미래를 약속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에게 ‘알렉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후 출세의 길을 버리고 교회를 위해 헌신합니다. 그러다 박해가 시작되자 배론으로 몸을 피해 토굴 속에 숨어듭니다. 그리고 한양으로 사람을 보내 박해 상황을 지켜봅니다. 며칠 후 그는 주문모 신부가 순교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습니다. 여러 날 동안 비통에 잠겨있던 황사영은 토굴 속에서 몰래 편지를 쓰기 시작합니다. 조선에서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죽어간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의 삶을 명주천 위에 한 자 한 자 새깁니다. 그리고 부디 북경의 주교가 어려움에 처한 조선 교회를 도와주기를 눈물로 호소합니다. 교회를 재건하고 싶어 하는 그의 간절한 마음은 1만 3천여 자에 실려 가로 62cm 세로 38cm의 명주천을 가득 채웁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편지마저 포졸에게 발각되고, 황사영은 체포되어 죽음을 맞이합니다.


황사영이 토굴 속에서 썼던 이 비밀편지가 다시 세상에 등장한 것은 1894년입니다. 의금부와 포도청에 있던 문서를 정리하던 관리인이 편지를 발견해 천주교 신자에게 전하고, 그가 다시 뮈텔 주교에게 전하면서 세상에 등장하지요. 뮈텔 주교는 황사영의 편지를 간직하고 있다가 1925년, 로마 바티칸에서 열리는 ‘조선 천주교 순교자 79위 시복식’에서 교황 비오 11세에게 올립니다. 황사영이 피눈물을 흘리며 썼던 편지, 그가 그토록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고 싶어 했던 편지가 124년 만에 바티칸에 전해진 것입니다.


- 2020년 2월 16일 연중 제6주일 서울대교구 청소년 주보 <하늘마음>에 실린 글 -



황사영백서.jpg 황사영백서 (사진출처 : 가톨릭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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