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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지큐레이터 May 07. 2021

감옥에서 쓴 한글편지

편지로 읽는 신앙3

1801년 겨울, 전주의 감옥에서 편지를 쓰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붙잡혀와 모진 고문을 받고, 평안도 벽동으로 유배를 갈 뻔하다가 전주의 감옥으로 되돌아온 여인이었지요. 그는 차가운 감옥 바닥에 칼을 차고 앉아 어머니와 언니에게 편지를 씁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가시면 그것은 특별한 은총이라고. 그러니 슬퍼하지 말고 기뻐해 달라며 유언이 될 편지를 씁니다.      


포졸들의 눈을 피해 감옥에서 편지를 쓴 여인은 이순이 루갈다입니다. ‘호남의 사도’라고 불리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며느리였지요. 이순이는 어렸을 때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하느님께 순명하며 ‘동정’으로 살기를 다짐합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오롯이 하느님께 바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아녀자가 혼인하지 않고 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차면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야했지요.    

  

동정으로 살고 싶어하는 이순이의 바람을 알게 된 주문모 신부는 전주에 사는 유중철 요한을 소개합니다. 그 또한 하느님을 위해 평생 정결을 지키며 살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뜻을 존중하기로 약속하고 혼인을 합니다. 혼인을 한 부부지만, 마치 수도자처럼 정결을 지키며 살기로 한 것이지요. 이들 ‘동정부부’는 4년 동안 함께 살면서 정결을 지킵니다. 그러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유항검과 유중철이 먼저 옥에 갇히고, 몇 달 후 이순이 마저 다른 가족들과 함께 붙잡히고 맙니다.      


‘천주학쟁이’로 감옥에 갇힌 이순이는 기꺼운 마음으로 죽음을 준비합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죽는 것을 지상 최고의 행복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하루빨리 하느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가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쁜 죽음’을 기다리던 이순이에게 생각지도 못한 불행한 소식이 전해집니다. 그를 죽이지 않고 평안도 벽동의 관청 노비로 보낸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순교가 꿈이었던 이순이는 국법을 어긴 대역죄인은 죽음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외칩니다. 자신을 살려주는 것은 나라에서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라며 호통을 치지요. 그리고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부디 하느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영광을 허락해 달라고.     


기적처럼, 유배길에 올랐던 이순이는 감옥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리고 살이 터지고 뼈가 꺾이는 고문을 다시 받게 되지요.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이순이는 어머니와 언니에게 편지를 씁니다. 혼인 후에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어머니에게 자신이 어떻게 동정을 지켜왔는지, 유중철 요한과 어떻게 살았는지, 지금 어떤 마음으로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지 한 자 한 자 적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위해 죽는 것이야 말로 ‘진실되고 보배로운 자식이 되는 것’이니 자신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도 절대로 슬퍼하지 말라고 청합니다.      


얼마 후, 이순이 루갈다는 시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합니다. 애타게 기다리고 꿈꾸던 죽음을 맞이한 것이지요. 그의 시신은 가족의 시신과 같이 수습되어 하나의 무덤에 묻힙니다. 전주 치명자산에 있는 ‘순교자의 묘’가 그와 가족들이 함께 묻힌 무덤입니다. 여섯 명의 가족과 한 곳에 잠들어 있는 이순이 루갈다.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쓴 편지, 어머니와 언니에게 전하려했던 그 편지가 이름 모를 신자들에 의해서 계속 필사되었고,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거든요. 하느님을 위해서 죽는 것은 ‘특별한 은총’이라고 말했던 이순이 루갈다. 그가 하느님 품 안에서 ‘특별한 은총’을 받으며 지내기를 기도합니다.     


     - 2020년 3월 15일 사순 제3주일 서울대교구 청소년 주보 <하늘마음>에 실린 글 -



이순이 루갈다의 한글 편지(치명자산 성당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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