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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지큐레이터 May 10. 2021

조선 교구의 주춧돌이 된 편지

편지로 읽는 신앙4

 

2020년 3월, 신자들과 함께 드리는 미사가 중단되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이었지요. 마음만 먹으면 날마다 미사를 드릴 수 있었는데, 주일 미사조차 드릴 수 없는 현실이 낯설었습니다. 주일을 지키기 위해 가족들과 둘러앉아 공소예절을 드리다 조선교회의 신자들이 떠올랐습니다. 미사를 집전할 사제가 없어 혼자 기도를 하며 언제쯤 성사의 은총을 누릴 수 있을까 기대하고 또 기대하던 신자들말이에요.     


1801년 신유박해로 주문모 신부와 교회의 지도층들이 순교하면서 조선교회는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었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유배인이 되었으며, 가까스로 화를 면한 사람들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겨야했으니까요. 그러나 사방으로 흩어져 살던 신자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리스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갈망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지요.     


숨 죽여 지낸지 10년이 되던 1811년, 조선의 신자들은 다시 한 번 교황님께 보낼 편지를 씁니다. 신유박해로 무너진 조선교회를 재건하기 위해서 사제를 보내달라고 청하는 편지였지요. 그러나 박해의 공포에서 완전히 벗어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해야했습니다. 만에 하나 이 편지가 발각되어도 누가 썼는지, 누가 주도했는지 알 수 없도록 ‘프란치스코와 조선의 다른 신자들’이라는 이름으로 써야했지요.     


이 편지에는 조선의 신자들이 책을 통해 교리를 접하게 됐고, 10년 후 사제가 파견되어 칠성사의 은혜를 받았으나, 큰 박해가 일어나 신부님과 수많은 교우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 적힙니다. 그로인해 살아남은 교우들도 깊은 슬픔과 두려움에 모두 뿔뿔이 흩어져 버렸고, 각자 숨어 살면서 하느님께서 큰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요. 그러니 하루 빨리 성사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성직자를 파견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조선의 신자들은 이 편지와 함께 북경주교에게도 편지를 한 통 씁니다. 1801년 이후에 조선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알리는 편지였습니다. 이 편지에는 순교자들의 명단과 순교과정이 적혀있습니다.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강완숙 골롬바, 이순이 루갈다, 정약종 아구스티노, 황사영 알렉시오 등이 순교한 과정을 상세히 적은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이 대박해 때 모두 죽고, 능력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귀양을 가게 됐으니 부디 신부님을 보내 조선에 교회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합니다.       


1811년 이여진을 통해 북경의 사라이바 주교에게 전해진 이 편지는 포르투갈어로 번역돼 비오7세 교황에게 전달됩니다. 그러나 조선 신자들은 아무런 답장을 받지 못하지요. 그로부터 5년 후, 정하상 바오로가 북경을 방문합니다. 그는 북경의 총대리 신부를 통해 사라이바 주교에게 조선의 상황을 전하고 선교사 파견을 청합니다. 그 결과 2명의 성직자가 파견되었으나 조선 입국에는 실패하고 맙니다. 그러나 조선의 신자들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1825년, 또 다시 교황청에 보내는 편지를 씁니다. ‘조선 교회의 암브로시오와 그 동료들’이라는 이름으로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고, 선교사들이 국내에 입국 할 수 있는 방법과 조선의 상황 등을 알리지요. 라틴어로 번역된 이 편지가 1827년에 레오12세 교황에게 전달되면서 조선 교회는 큰 변화를 맞이합니다. 이 편지 덕분에 조선 교회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고 1831년에 드디어 조선 교구가 설립되었거든요. 가장 어두운 시기에 눈물로 쓴 신자들의 편지가 조선 교구를 설립하는 희망의 주춧돌이 된 것입니다.                      


             - 2020년 4월 19일 부활 제2주일 서울대교구 청소년 주보 <하늘마음>에 실린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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