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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지큐레이터 May 24. 2021

길 위에서 쓴 편지

편지로 읽는 신앙8



1847년 4월 20일, 홍콩의 작은 방에서 한 신부가 편지를 씁니다. 동료 안드레아 신부의 죽음을 비통해하며, 그와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라틴어로 번역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라틴어 실력이 너무 빈약하고, 문장이 서투르다며 스승님께 살펴봐 달라고 부탁합니다. 잘못된 곳을 수정해 로마에 소식을 전하면, 자신의 가련한 조국을 위해 로마교회가 함께 기도해 줄 것이라고요.      


두 번째 방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는 1842년부터 1860년까지 거의 해마다 스승 신부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어디를 가든 자신이 보고 듣고 배운 것에 대해 스승 신부님들에게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최양업은 1845년부터 시도한 조선 입국이 번번이 실패하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소식까지 전해지자 1847년 4월에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편지를 써 번역 수정과 기도를 부탁합니다.       


1845년부터 5년 동안 조선 입국을 시도했던 최양업은 1849년 12월이 돼서야 조선에 들어옵니다. 서울에 도착해 다시 충청도로 떠나 페레올 주교에게 인사를 전한 뒤, 바로 다음날부터 성무집행을 시작하지요. 그는 다섯 개의 도를 돌면서 신자들을 만나 성사를 집전합니다. 그리고 1850년 10월 1일, 충청도의 도앙골에서 다시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편지를 씁니다. 지루하고 길었던 탐험이 끝나고 조선에 도착했다는 편지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보고합니다. 어떤 마을에는 신자가 겨우 3명뿐이었지만, 어떤 마을에는 2백 명이나 되는 신자들이 있었다고요. 그러나 어느 곳 하나 안전한 곳이 없었다며, 여전히 선교에 위험이 따르는 조선의 상황에 대해 전합니다. 신자들을 돌보고 있으면 언제나 믿지 않는 자들이 쫓아와 욕설과 저주, 협박을 일삼기 때문에 서둘러 교우촌을 빠져나와야 했다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성사를 받지 못한 신자들은 백리를 걸어 자신을 따라와 성사를 받고, 궁핍한 생활 가운데서도 하느님을 믿고 따르고 있다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거의 해마다 스승 신부님들께 편지를 썼던 최양업 신부는 1860년 9월 3일, 하나의 종이에 두 명의 수신인의 이름을 적어 편지를 씁니다. 죽림에서 쓴 그의 편지를 받는 사람은 리부아 신부와 르그레주아 신부였습니다. 최양업 신부는 박해의 폭풍을 피해 조선의 구석진 한 모퉁이에 갇혀 교우들과 연락도 못하고 지내고 있다며, 절박한 심정을 토로합니다. 벌써 몇 달 전부터 주교님과 다른 선교사 신부님들의 소식을 들을 수 없어 그들의 생사조차 알 수 없다고요. 그는 이 박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관할구역에서도 신자가 17명이 체포되었고, 거의 모든 신자들이 마을에서 쫓겨났으며 자신 또한 의지할 곳 없이 처참하게 떠돌아다니고 있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그는 소문으로 들은 순교자들의 이야기들을 빠짐없이 기록합니다. 교우촌을 세워 교리교육을 했던 노파와 아버지와 함께 형장에 나가게 해달라고 했던 열여섯 살 소년, 가족들이 옥에 갇혀 혼자서 피난을 다니다 임종을 맞은 아가다의 이야기까지 전하며 그들의 삶을 편지에 남깁니다. 그리고 두 신부님께 하직 인사를 드립니다. 더 이상 자신을 추적하고 있는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느꼈기 때문입니다. 최양업 신부는 올해 1,622명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어른 203명에게 세례성사를 집전했으며, 신자들이 임종하는 13명에게 대세를 주고, 예비자로 398명이 등록했다는 보고를 끝으로 마지막 편지를 마칩니다. 그리고 9개월 후인 1861년 6월, 연풍성지 근처 문경에서 병사합니다.      


조선인 사제로 12년 동안 해마다 7천리를 걸었던 최양업 신부. 그가 길 위에서 쓴 편지를 읽으며 그의 땀이 우리의 신앙으로 이어져왔음을 느낍니다.           


     - 2020년 8월 16일  연중 제20주일 서울대교구 청소년 주보 <하늘마음>에 실린 글 - 


    

배론 성지 '최양업 신부상' (출처:가톨릭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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