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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지큐레이터 Jun 30. 2021

일제강점기에 기록된 편지

편지로 읽는 신앙10

1896년 4월 26일, 약현성당에서 사제 서품식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열린 서품식이었지요. 강도영, 정규하, 강성삼은 김대건, 최양업에 이어 47년 만에 탄생한 한국사제였습니다. 같은 해에 서품을 받은 세 사람은 나이순서대로 강도영 마르코가 세 번째 사제, 정규하 아우구스티노가 네 번째 사제, 강성삼 라우렌시오가 다섯 번째 한국인 사제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들은 각각 경기도 안성 미리내본당, 강원도 횡성 풍수원본당, 경남 밀양(명례)본당으로 부임해 사목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풍수원본당으로 부임한 정규하 신부는 생을 마치는 날까지 풍수원본당의 사제로 살았습니다. 47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요. 그는 풍수원에서 사목하면서 114통의 편지를 남겼는데, 모두 <뮈텔문서>에 수록되었습니다. 정규하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는 자신의 거처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풍수원본당과 하일본당 중에서 풍수원본당에 머물게 되었다는 보고였지요. 그 편지를 시작으로 정규하 신부는 1년에 3~4통의 편지를 적어 서울로 보냅니다. 본당에서 사목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런데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작성된 그의 편지 속에서 격변하는 우리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정규하 신부가 남긴 편지 중에서 제가 가장 관심 있게 살펴 본 편지는 일본과 관련된 편지입니다. 횡성에 있는 공소를 일본에게 빼앗겼다는 편지였지요. 사연은 이렇습니다. 1910년 7월 23일, 정규하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편지를 씁니다. 횡성군 창봉에 있는 공소집을 일본 순사와 헌병들이 와서 강제로 빼앗아갔다는 내용이었지요. 그 집은 공소로 활용할 수 있도록 애써서 지은 집으로 여러 해 동안 공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일본순사가 갑자기 찾아와서 포기각서를 쓰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며칠 후, 일본 헌병들은 정규하 신부를 불러 공소를 자기들이 차지하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부탁을 가장한 협박이었지요. 혹시나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신부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계략이었던 것입니다. 정규하 신부는 자신이 그 청을 거절하면 신자들이 엄청난 보복에 시달릴 것을 걱정해 ‘그러라’고 대답합니다.      


1916년 1월 1일에 쓴 편지에도 일본사람들에게 시달리는 내용이 나옵니다. 1915년 11월에 발행된 《경향잡지》에 뮈텔 주교와 드망즈 주교는 폴란드 교우들을 위해서 마음을 모아달라는 글을 발표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고통 받고 있는 교우들을 위해서 기도와 기부를 부탁한다는 글이었지요. 이 소식을 듣고 본당의 많은 사제들이 신자들과 봉헌금을 모읍니다. 정규하 신부도 신자들과 함께 16냥을 모아 보냈는데, 이 일로 일본의 조사를 받게 됩니다. 12월 26일 보조원이 정규하 신부를 찾아와 폴란드인을 위해서 얼마를 걷었는지, 누가 많이 냈는지, 몇 사람이나 헌금 하였는지 조사를 했던 것입니다. 정 신부는 16냥 정도의 헌금이 모였지만 누가 얼마를 냈는지는 알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신자들을 찾아가 조사를 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빼앗긴 나라에서 사목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규하 신부는 고아들을 돕는 ‘성영회’를 운영하고, ‘삼위학당’을 개설해 신학문과 우리말을 가르치며 인재를 양성했습니다. 그리고 라틴어를 모르는 신자들이 함께 성가를 부를 수 있도록 라틴어 성가에 한글로 음을 달기도 했지요. 47년 동안 풍수원본당의 사목자로 공동체를 이끌어 가던 정규하 신부는 1943년 10월 23일 하느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의 유해는 본당 뒷산에 안장되어 지금도 풍수원본당의 신자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 2020년 10월 18일, 서울대교구 청소년 주보 <하늘마음>에 실린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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