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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지큐레이터 Jan 18. 2022

교황청으로 날아간 편지들

- 편지책으로 읽는 교회1


안녕 리엘? 나는 교회에 대한 편지를 소개할 편지큐레이터야. 그냥 편하게 ‘아가타샘’이라고 불러주면 좋겠어.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가워. 그러고 보니 네 이름은 소식을 전하는 천사,  ‘가브리엘’을 닮았구나! 너와 편지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기쁘다. 뭐라고? 반갑기는한데, 교황님도 SNS를 하는 시대에 웬 편지냐고? DM 하나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도 실시간으로 연락을 할 수 있는 세상에! 네 말이 맞아. 빠르게 휙휙 돌아가는 세상에서 한 땀 한 땀 손으로 쓰는 편지는 별 볼일 없는 것일 수도 있어. 게다가 내가 오늘 소개할 편지들은 200년도 훨씬 전에 쓴 편지라서 어쩌면 ‘케케묵은 옛날이야기’ 정도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교회에 남은 편지들을 소개하려고 하는 건, 우리가 함께 기억했으면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야. 편지 속에 숨어있는 ‘사람’말이야.     


혹시 알고 있니? 우리나라는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천주교’가 생겨났다는 걸. 선교사가 들어와서 “예수를 믿으시오”라고 전파한 것이 아니라, 학자들이 책을 보고 공부하다 ‘천주’를 알게 됐고, 1784년 이승훈이 북당에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으면서 조선에 천주교 신자가 생겼단다. 그는 사신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갔다가 세례를 받았는데, 조선으로 돌아와서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어. 이승훈이 사제였냐고? 아니. 그는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이었는데, 자신도 세례를 베풀 수 있는 줄 알았던거지. 그런데 몇 년 후에 이게 엄청난 잘못임을 알게 됐어. 사제수품을 받지 않은 사람이 세례를 주는 것은 ‘독성죄’라는 것을 책 속에서 찾아낸 거야. 그래서 부랴부랴 북경의 주교님께 편지를 써서 보냈어.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고백하고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묻는 편지였지. 그리고 편지 끝에 조선에 신앙의 뿌리가 단단하게 내릴 수 있도록 사제를 보내달라고 부탁을 했단다.       


우리 선조들은 이승훈 베드로의 이름으로 쓴 편지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 북경에 편지를 보내. 성직자를 파견해 달라고 청하기도 하고, 조선에 박해가 일어나 신자들이 순교했다는 소식을 알리기도 하지. 조선의 신자들이 한문으로 쓴 편지는 라틴어, 이탈리어, 포르투갈어, 불어 등으로 번역돼서 프랑스와 로마로 날아갔단다. 오랜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결국 교황님께도 전달이 되었어. 이 당시에 조선 신자들이 쓴 편지는 물론, 이 편지를 받은 사제와 주교들이  각국의 언어로 쓴 편지를 담은 책이 있어.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이라는 책이야. 이 책은 윤민구 신부님께서 교황청에 있는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자료를 번역해서 엮은 것이란다. 2000년에 출간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구하기 힘들지만, 샘은 이 책이 무척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해. 하느님을 향한 우리 선조들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편지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야.      



윤유일 바오로 (출처: CBCK)

이 책에 있는 편지들을 읽으면, 목숨을 걸고 편지를 전달했던 사람들이 떠올라. 그 때는 이런 편지를 전달하는 게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었거든. 조선 신자들이 명주천에 적은 편지는 밀사의 옷 속에 꿰매진 채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건너갔어. 국경 수비대의 검문을 피하기 위해서였지. 만에 하나 이 편지가 발각되면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야. 당시에 천주교는 나라에서 금하는 종교였어. 조선은 유교의 나라였거든. 천주교는 ‘서양에서 들어온 학문’이라고 해서 ‘서학(西學)’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조선이 믿는 주자학에 위배되는 교리를 가르치는 ‘간사한 학문’이라는 뜻으로 ‘사학(邪學)’이라고 불렸단다. 그래서 천주교를 믿다가 발각되면 사형을 당하기도 했어. 그러니 ‘사제를 보내달라’, ‘조선에 박해가 일어났다’는 편지를 전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 알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맡아서 한 사람들이 있었단다. 내가 오늘 너와 함께 기억하고 싶은 사람은 바로 윤유일 바오로야. 1790년 북당의 사제에게 조선에 신자가 있음을 알리고, 사제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전달한 사람이 바로 윤유일이었거든. 그는 1794년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들어올 때도 지황과 함께 신부님을 안내했어. 그리고 그것 때문에 1795년 6월 28일에 체포돼서 참수로 순교했지. 목숨을 걸고 북경으로 가서 편지를 전달하고, 조선에 첫 사제를 모시고 왔던 윤유일 바오로. 이 분은 2014년 8월 15일에 시복되었어. 만약에 이 분이 없었다면 조선에 떨어진 신앙의 싹이 뿌리를 내리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거야.      


그래서 말인데… 오늘은 윤유일 바오로 복자에게 편지를 한 번 써보면 어떨까? 뭐라고? 그냥 DM으로 보내겠다고? 좋아! 하늘을 향해 DM을 휙 보내보렴. 그러려면 먼저 성호경을 그어야겠네. 하늘로 보내는 DM은 기도일테니까 말이야.     




                                                <하늘마음> 2022년 1월 9일 주님세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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