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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지큐레이터 Feb 14. 2022

첫 번째 주교의 편지들

- 편지책으로 읽는 교회2


리엘! 2021년 12월 8일 명동성당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 서울대교구장 착좌 미사가 있었어. 착좌가 뭐냐고? ‘착좌’란 자리에 앉거나, 어떤 직위에 취임하는 걸 말해. 그러니까 서울대교구장 착좌미사가 있었다는 건, 새로운 교구장이 탄생했다는 걸 뜻하지. 교구장 착좌 미사가 명동성당에서 거행된 이유는 명동성당이 ‘주교좌 성당’이기 때문이야. 명동성당은 서울대교구장인 주교님께서 집무하는 주요 교회이고, 성당 안에는 주교님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자가 있어. ‘착좌 미사’가 있었다는 것은 성당 안에 마련된 의자에 주교님께서 처음으로 앉으셨다는 의미가 있지. 지난 12월 8일에 정순택 베드로 주교님께서 서울대교구의 14대 교구장으로 착좌하신거야.      


그럼 리엘, 샘이 퀴즈 하나 내 볼게. 서울대교구의 최초의 교구장은 누구였을까? 잘 모르겠다고? 그럼 샘이 알려줄게. 서울대교구 최초의 교구장은 브뤼기에르 주교님이었어. 이름에서 느껴지듯이 이 분은 프랑스인이었단다. 브뤼기에르 주교님은 서울뿐만 아니라 한국천주교회를 담당하는 첫 번째 주교였단다. 그때 한국은 ‘조선대목구’였어. 대목구는 정식으로 교회의 체계가 잡히지 않은 교구를 일컫는 말인데, 교황이 직접 관할하는 교구를 뜻해. 우리나라는 1784년 이승훈 베드로가 세례를 받으면서 한국교회에 신앙공동체가 생겼어. 이듬해인 1795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님이 몰래 입국해서 사목하셨고, 1801년에 순교하셨지. 그 이후 우리 교회에는 성사를 집전할 사제가 없었단다. 조선의 신자들은 우리나라에 사제를 파견해 달라고 계속해서 교황청에 편지를 보내. 끊임없는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사제가 와서 성사를 집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조선의 신자들이 중국을 통해서 교황청으로 보냈던 편지를 브뤼기에르 신부가 읽게 됐어. 그는 프랑스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26년 2월 5일에 샴(타이)의 선교사로 임명받았지. 브뤼기에르 신부는 임지로 가기 위해 잠시 마카오 주재 교황청 포교성성 경리부에 들렀다가 조선인들이 보낸 편지에 대해서 알게 되지. 브뤼기에르는 ‘선교사를 파견해달라’는 조선신자들의 편지를 읽고, 자신이 조선으로 가겠다고 다짐해. 그리고 계속해서 프랑스외방전교회의 담당자에게 편지를 보내. 두려워하지 말고 조선의 선교를 우리가 맡자고, 자신이 가장 먼저 조선으로 들어가겠다고 말이야. 당시에 프랑스외방전교회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는 이유로 조선 교회 선교를 맡지 않으려고 했어. 그러나 브뤼기에르 신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들을 설득하는가 하면, 교황청에 자신을 조선에 보내달라고 요청해. 4년 동안이나 끊임없이 자신을 조선에 보내달라고 요청하지.  

    

1831년 9월 9일, 브뤼기에르의 뜻을 받아들인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조선교구를 설립하고 브뤼기에르를 조선교구장으로 임명해. 그러나 브뤼기에르가 이 소식을 전해 듣는데 1년이나 걸렸단다. 그때는 편지가 유일한 통신수단이었기 때문에 1832년 7월 25일에야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이 조선교구의 교구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돼. 하지만 브뤼기에르의 마음은 편치 않았단다. 자신이 소속돼 있는 프랑스외방전교회에서 여전히 조선의 선교를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1833년 8월 26일에 프랑스외방전교회에서 조선 선교를 책임지기로 확정했지만, 그때까지도 브뤼기에르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어. 그래서 조선으로 출발하면서도 걱정이 태산이었단다.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정양모 신부.윤종국 신부 옮김 / 가톨릭출판사


브뤼기에르는 1832년 11월 18일, 마카오에서 우리나라 신자들에게 편지를 썼어. 교황님께서 여러분의 청을 들어주시어 자신이 조선으로 가게 되었다고, 그러니 빨리 만나서 함께 조선으로 들어가자고 말이야. 그리고 자신은 조선에 도착하면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 삶을 바칠 거라고 약속하지.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단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에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왜냐고? 그는 조선의 신자들을 만나기 위해서 걷고 또 걸었어. 중국의 거의 모든 영토를 지나며 조선으로 향했지. 먹을 게 없어서 개구리를 잡아 통째로 삶아 먹기도 하고, 돗자리 하나만 깔고 숲 속에서 잠을 자기도 했어. 길고 험한 여정을 통과하며 조선의 신자들을 만나기 위해 걸었지. 그러나 길고 험한 여정에 지친 브뤼기에르는 1835년 10월 20일, 조선을 지척에 둔 네이멍구 마찌아즈에서 선종했단다.      


이런 사실을 다 어떻게 알았냐고? 샘이 브뤼기에르 주교님이 남긴 편지를 읽었거든.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정양모 신부•윤종국 신부 옮김/가톨릭출판사)이라는 책인데, 이 책에는 주교님의 편지는 물론, 교황님이 보낸 칙서도 있어. 그리고 1931년 조선교구 100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용산성직자 묘역에 이장된 주교님의 묘 사진도 있단다. 궁금하면 너도 한 번 읽어봐. 뭐라고? 그냥 샘이 들려준 이야기로 만족하겠다고? 응 그래. 그럼 이거 하나만 기억해줘. 우리 한국교회를 위해서 ‘조선 선교의 기틀을 마련하신 분’이 초대 교구장이었던 ‘브뤼기에르’ 주교님이라는 사실을. 알겠지?      


                                         <하늘마음> 2022년 2월 13일 연중제6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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