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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지큐레이터 Mar 15. 2022

샤스탕 신부의 편지

- 편지책으로 읽는 교회3

리엘! 혹시 삼성산성지를 알고 있니? 관악구 삼성산에 있는 성지 말이야. 이곳에는 우리나라 두 번째 주교님이었던 앵베르 주교님과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를 신학생으로 선발했던 모방신부님, 그리고 이들과 함께 협력하며 사목했던 샤스탕 신부님의 유해가 모셔져 있어. 샘은 오늘 이 분들 가운데서 가장 낯선 이름일지도 모르는 ‘샤스탕 신부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해. 프랑스 남동부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조선에서 삶을 마친 자크 오노레 샤스탕에 대해서 말이야.      


샤스탕 신부님은 1803년 프랑스에서 태어났어. 1826년 12월에 사제 서품을 받았는데, 그의 성소는 그냥 사제가 아니었단다. 이미 열일곱 살 때부터 하느님께서 자신을 ‘선교 사제’로 부르고 계심을 깨닫고 프랑스가 아닌 다른 나라에 가서 하느님을 전하기로 결심했지. 그래서 샤스탕 신부는 사제가 된 후에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했고, 1827년 4월에 중국 사천대목구로 파견됐어. 하지만 그의 마음에는 조선 선교에 대한 갈망이 있었어.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조선으로 떠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던 거야. 샤스탕 신부는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선교사제가 되길 바랐어. 그래서 시간이 날 때 마다 동료 사제들과 친구들에게 ‘선교사제’로 초대하는 편지를 썼어.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는 성경을 편지에 적고 그들에게 수확할 밭으로 떠나는 일꾼이 되자고 초대한 거야.      


샤스턍의 초대 편지는 페낭신학교에서도 계속 됐단다. 그는 페낭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근처에 있는 본당 사목도 함께 했는데, 틈만 나면 편지를 써서 선교의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 했어. 그리고 자신은 늘 조선으로 갈 수 있기를 원한다고 말했지. 1833년 5월, 샤스탕 신부는 모방 신부와 함께 조선으로 들어갈 방법을 모색했어. 모방 신부는 육로를 통해서, 샤스탕 신부는 해로를 이용해서 입국하기로 했는데 샤스탕은 조선에 입국하지 못했단다. 겨우겨우 조선 국경에 도착했지만 자신을 안내해줄 신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야. 그는 산동지역에서 사목을 하며 때를 기다려야했어. 그러다 2년 후인 1836년 11월 9일, 드디어 조선으로 출발할 수 있었지. 1837년 1월 1일에 조선에 도착한 샤스탕 신부는 상복으로 갈아입었어. 상복은 선교사들에게 중요한 변장 도구였어. 상복을 입고 얼굴을 가린 채로 다니면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기 때문에 서양인이라는 사실을 숨길 수가 있었거든.       


상복을 입고 활동하던 선교사들의 모습 (파리외방전교회 2021년 성탄구유 모습 중 일부)


상복을 입고 서울에 도착한 샤스탕은 먼저 입국해 있던 모방 신부를 재회했어. 그리고 조선말을 배우고 사목을 시작했지. 강원도와 전라도 경상도를 다니며 미사를 드리고 세례 성사와 혼인 성사를 집전했어. 그러는 사이 앵베르 주교님이 조선에 도착했고, 우리나라에서 세 명의 사제가 함께 사목을 하게 되었단다. 덕분에 1836년 초에 4천명이었던 신자가 1838년에는 만 명에 이르게 되었어. 하지만 이들의 사목은 오래가지 못했어. 1839년 1월에 서울에 있던 신자들이 체포되었고, 4월에 공소 회장의 집에서 주교의 물품이 압수되면서 서양인 선교사의 존재가 알려졌기 때문이야. 앵베르 주교는 자신들 때문에 신자들이 박해당할 것을 염려해 스스로 관아로 갔고, 멀리 떨어져 있던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에게도 자수할 것을 권고했어.    

  

샤스탕 신부는 관아로 가기 전에 편지를 썼어. 가장 먼저 가족들에게 자신이 곧 순교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전했지. 그러나 샤스탕 신부는 가족들에게 ‘슬퍼하지 말고 하느님께 한없이 감사를 드리라’고 말해. 자신은 하느님께 바친 사람이고 하느님을 실제로 모시게 됐으니 기쁜 일이라고 말이야. 이이서 동료 사제들에게 편지를 쓴 샤스탕은 자신이 죽는 것보다 또 다시 홀로 남겨질 조선의 신자들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고 하지. 그러나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순교의 길을 가겠다고 전하고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어. 이 편지를 남기고 샤스탕 신부는 모방신부와 함께 관아로 나가 자수를 해. 그리고 1839년 9월 21일, 앵베르 주교님과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하신단다. 이 분들의 시신은 신자들이 노고산에 매장했다가 1843년에 삼성산으로 옮겼어. ‘삼성산성지’가 바로 그 분들의 무덤이 있던 곳이야. 그 후 세 분의 유해는 1901년에 교회에서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모셨다가 명동성당 지하 묘지에 안장했지. 세 분은 1984년 5월 교황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그 후 세 분의 유해 일부를 오래전에 묻혔던 삼성산성지에 모시게 된 거야.     


《샤스탕 신부의 서한》,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 수원교회사연구소

리엘! 이제부터라도 ‘삼성산성지’의 이름을 듣게 되면 기억해줄래? 그곳에 세 분의 신부님이 계시단 걸 말이야. ‘삼성산’은 산의 이름일 뿐이지만, ‘세 명의 성인이 계신 곳’이라고 생각하면 더 쉽게 기억할 수 있을 거야. 앵베르, 모방, 샤스탕. 이 분들의 이름과 짧았지만 깊었던 조선에서의 삶을 함께 기억해주면 좋겠어. 그럼 잘 지내고 다음에 또 만나자. 안녕!


                                - <하늘마음> 2022년 3월 13일 사순 제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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