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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지큐레이터 Jul 27. 2022

강도영 신부의 편지

편지책으로 읽는 교회7

리엘! 한국인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은 신부님이 누군지 아니? 맞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야.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두 번째 신부님이고. 그럼 우리나라 세 번 째 신부님은 누굴까? 혹시 알고 있니? 한국인 사제 중에서 세 번째로 사제 서품을 받은 분은 강도영 마르코 신부님이야. 강도영 신부님은 1896년 4월 26일에 약현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어. 이 서품식은 우리나라에서 열린 최초의 서품식이었단다. 강도영 신부님은 정규하, 강성삼 신부님과 함께 사제 서품을 받았는데, 세 분 중에 강도영 신부님이 가장 연장자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세 번째 신부님으로 기록되었어. 샘이 오늘 소개할 교회 편지책은 강도영 신부님의 편지를 모은 《강도영 마르코 신부 서한집》이란다.     


강도영 신부님은 사제 서품 후 미리내 성당 초대신부로 임명을 받았어. ‘미리내’는 김대건 신부님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신앙을 지켜온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교우촌’이었어. 강도영 신부님이 발령을 받고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가난한 화전민들 35가구가 살고 있었다고 해. 신부님은 미리내 성당에 머물면서 이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고 성사 생활을 하면서, 근처에 퍼져있는 34개의 공소를 오가며 사목활동을 하셨어. 그러나 사목은 쉽지 않았어. 신부님이 미리내 본당에서 사목을 시작했을 때는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명성황후 시해 사건 등으로 나라가 혼란한 상태였거든. 치안은 불안했고, 때때로 마을에 강도들이 나타나 교우들을 공격하기도 했어. 그래서 한 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이었단다.      


시대적인 문제로 본당 사목을 하는 게 쉽지 않았지만, 강도영 신부님은 최선을 다하셨어. 본당에 부임해서 고아들을 양육하는 사업을 시작했고, 어려운 신자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어. 신부님은 신자들이 교회에 봉헌한 특별헌금 중에 일부를 떼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써도 되는지 주교님께 묻기도 했단다. 성당 근처에 걸어 다닐 수 없어 구걸도 못하는 나병에 걸린 여인과 어린 시각장애인 아들을 둔 정신장애인 엄마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야. 신부님은 이들이 기아와 추위로 죽지 않도록 헌금의 일부를 쓸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주교님께 요청하셨어. 뿐만 아니라 가난한 신자들이 궁핍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양잠을 권하기도 하셨단다. 일제강점기였던 1921년, 조선총독부에서 담배를 독점으로 판매하면서 담배를 재배하며 살던 교우들의 생활이 어려워졌어. 강도영 신부님은 교우들이 담배를 재배하는 것보다 양잠을 통해서 더 나은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직접 뽕나무 묘목을 배양해서 나눠주고, 교구에서 돈을 빌려 누에고치를 구입해 교우들이 누에를 칠 수 있도록 하셨단다.      


《강도영 마르코 신부 서한집》, 천주교 수원교구 미리내 성지


가난한 신자들을 위한 신부님의 노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어. 1922년에는 큰 홍수가 나서 신자들이 어려움에 처하자,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젖소를 팔려고 내놓는가 하면, 본당이 소유한 논과 밭을 팔아 신자들을 도울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주교님께 편지를 쓰기도 했어. 강도영 신부님은 홍수로 모든 것을 잃은 신자들이 굶어 죽거나 유리걸식하는 것을 볼 수 없다며, 주교님께 편지를 써 읍소했단다. 또, 신부님은 양잠을 치느라 미사를 드리지 못하는 신자들을 위해서 ‘파공 관면’을 요청하기도 했어. ‘파공’은 ‘주일이나 의무 축일에 육체적인 노동을 하지 않고 거룩하게 지내는 것’을 뜻하는데, 한창 양잠을 해야 하는 때에 ‘성령 강림 대축일’이 있었기 때문이야. 신부님은 신자들이 미사에 참례하느라 누에를 치지 못해서 누에들이 죽어 치명적인 손해를 보게 될까봐 주교님께 특별히 ‘파공 관면’을 부탁한 거란다.      


33년 동안 미리내 성당에서 사목했던 강도영 신부님은 판공시기가 다가오면 34개의 공소를 돌아다니며 성사를 집전했고, 공소 방문 때 만났던 신자들의 상황을 기록해 주교님께 보고했어. 기후가 나빠서 많은 사람들이 독감을 앓고 있으며 적지 않은 교우들이 사망했다는 소식도, 열심히 공소를 다니며 교우들을 돌보고 있지만, 새로운 신자들이 늘지 않아 괴롭다는 마음도 뮈텔 주교님께 보낸 편지에 그대로 남아 있단다. 교우들을 돌보는 일에 열과 성을 다했던 신부님은 1929년 3월 12일에 선종하셨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묘소 옆에 안장되었어.     


샘은 강도영 신부님의 편지를 읽으면서, 신자들을 하느님 가까이로 초대하는 ‘홍반장’ 같은 신부님을 만났어. 마을의 크고 작은 일들을 앞장서서 해결하고, 교우들이 처한 어려운 문제를 함께 풀어내고,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못하는 게 없는 홍반장’ 같은 신부님 말이야. 강도영 신부님은 이런 모든 것들을 통해서 신자들을 하느님 가까이로 초대하시는 분 같았거든.  리엘, 너도 이런 신부님을 만나고 싶니? 그렇다면 《강도영 마르코 신부 서한집》을 읽어보렴. 샘이 왜 ‘홍반장’을 떠올렸는지 너도 알게 될 테니까. 그럼 리엘, 우리는 다음에 또 만나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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