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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지큐레이터 Aug 15. 2022

안중근을 기록한 빌렘 신부의 편지

편지책으로 읽는 교회 #8



리엘! ‘빌렘’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있니? 그럼 ‘홍석구’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 이름이라고? 그래, 그럴지도 몰라. 샘도 책을 통해서 보기 전까지는 몰랐던 이름이니까. ‘빌렘’과 ‘홍석구’는 한 사람을 지칭하는 이름이야. ‘빌렘’은 ‘니콜라 조제프 마리 빌렘’을 줄인 이름이고, ‘홍석구’는 빌렘의 한국 이름이거든. 이 분은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제였어. 너는 ‘또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님이에요?’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 분에 대해서 알게 되면 빌렘 신부님을 기억하고 싶어질 거야. 왜냐면 이 분이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포살한 안중근 의사에게 세례성사를 베푼 사제이자, 그에게 마지막 성사를 베푼 사제였으니까.     


빌렘 신부님은 1883년 2월 17일에 사제서품을 받고,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에서 5년 동안 신학생을 양성했어. 그러다 1888년 조선교구에 배속되어 2월에 입국을 했지. 조선에 도착한 빌렘 신부님은 제물포 성당을 설립하는가 하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쳤어. 그 후, 황해도 지역 전담 사제가 되어 매화동과 청계동 본당에서 사목을 시작했어. 빌렘 신부님이 안중근 가족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청계동 본당에서였어. 안중근의 아버지인 안태훈이 그곳에서 열심히 활동을 하고 있었고, 신부님은 안태훈과 안중근을 비롯해 안중근 일가 친척에게 세례성사를 베풀었어. 신자가 된 안중근은 복사를 하며 빌렘신부님을 도왔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신부님과 상의를 했다고 해. 빌렘신부님이 안중근의 영적 아버지였기 때문이야.     


두 사람의 인연이 잠시 멈춘 것은 1906년이었어. 반일운동을 위해 상해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던 안중근이 이듬해 황해도를 떠나면서 가족들 또한 진남포로 떠나게 됐고, 빌렘 신부님과 소식이 끊기고 말았지. 1909년 10월 31일, 빌렘 신부님은 하얼빈에서 의거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했어.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누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는지는 알지 못했지. 빌렘 신부님은 11월 3일에서야 그가 안중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큰 충격에 휩싸였어. 신부님은 주일 미사 때 강론을 통해서 신자들에게 말했어.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가는 살인은 그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화 될 수 없다고 말이야. 그러나 빌렘 신부님은 사형선고를 받고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요청하는 안중근을 모른 척 할 수 없었어. 그래서 뮈텔 주교님께 자신이 뤼순 감옥으로 가서 안중근을 만나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집전하겠다는 뜻을 전하지. 그러나 뮈텔 주교님은 가톨릭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빌렘 신부가 뤼순으로 떠나는 것을 반대했어. 그 어떤 사제도 안중근에게 성사를 베풀지 못하도록 하셨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렘 신부님은 안중근에게 성사를 베풀기 위해서 뤼순으로 향했어.      


1910년 3월 2일, 눈발을 헤치며 중국으로 향한 빌렘 신부님은 닷새가 지난 7일에야 뤼순에 도착했어. 다음 날인 8일, 안중근의 동생인 안정근 치릴로와 안공근 요한과 함께 감옥으로 가서 안중근을 만났지. 간수들이 함께 배석한 면회였어. 안중근은 신부님께 고해성사와 미사를 요청했지만, 간수들은 개인적인 면회를 허락할 수 없고 독살의 위험 때문에 외부음식인 제병도 들일 수 없다며 이를 거절했어. 그러나 빌렘 신부님은 그들을 설득해 고해성사와 미사를 집전하셨어. 고해장소에 간수와 통역사가 함께 있기로 하고, 미사 때 사용할 제병도 감옥에서 관계자가 직접 만드는 조건이었어. 신부님은 아주 천천히 성사를 집전했어. 5년 만에 성사를 받는 안중근이 이 시간들을 깊이 누리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야. 빌렘 신부님은 안중근에게 성체성사와 노자성체(죽을 위험이 있는 신자가 마지막으로 모시는 성체)를 한꺼번에 베풀었어. 그리고 조선으로 돌아와 부활절인 3월 27일에 ‘사형이 집행되었음’이라는 전보를 받으셨지. (안중근의 사형은 3월 26일에 집행됐어.)      


빌렘 신부님은 뮈텔 주교님이 허락하지 않은 성사를 집전했다는 이유로 60일 동안 성무집행을 정지당했어. 그러나 끊임없이 자신이 뤼순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고 성무집행정지처분의 부당함을 호소했어.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편지를 보내고, 교황청 포교성성에도 서한을 보내 사제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음을 소명하지. 그러나 1914년 4월, 신부님은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돌아가게 되었고, 고향인 알자스에서 사목하며 한국을 위해 기도하셨다고 해. 그리고 1938년 5월 16일에 선종하셨어.     


자신이 세례성사를 베풀고, 복사를 서며 곁에서 미사를 드리고, 어려운 일들을 함께 상의하던 안중근 토마스에게 마지막 성사를 베풀어야 했던 빌렘 신부님의 마음은 어땠을까? 교회가 허락하지 않았지만, 먼 길을 한 달음에 달려가 안중근과 마주한 신부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다면,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발행한 《빌렘 신부, 안중근을 기록하다》를 읽어보렴. 빌렘 신부님이 뮈텔 주교님께 보낸 편지 중에서 26통을 번역한 책인데, 안중근 집안과 빌렘 신부님의 관계는 물론, 안중근에게 마지막 성사를 베풀었던 신부님의 심정을 자세하게 알 수 있을 거야.     


<빌렘 신부, 안중근을 기록하다>, 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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