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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지큐레이터 Jan 16. 2023

내 편지의 역사

편지큐레이터 입니다만3

나의 편지쓰기는 회사에 취직해서도 이어졌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직을 했는데, 함께 근무하는 직원들은 물론, 다른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에게도 편지를 써서 보내곤 했다. 행낭에 서류를 넣어 보낼 때 포스트잇에 받는 사람의 안부를 묻는 짧은 쪽지를 보내고, 생일인 직원에게는 축하 카드를 적어 주었다. 덕분에 회사 생활을 조금 편하게 할 수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적어 보낸 짧은 문장들이 ‘업무 협조’를 원활하게 해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나는 모뎀선을 타고 넘나들며 만난 PC통신 동호회 사람들에게도 편지를 썼다. 게시판을 읽거나 채팅을 하면서 알게 된 정보를 활용해 전국에 있는 동호회 사람들에게 편지를 쓴 것이다. 나는 그 때를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절로 꼽는데, 그 시절의 나는 온갖 고민으로 들끓던 청춘들의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 편지를 썼고, 내가 쓴 편지는 ‘빠른우편’이 찍힌 파란색 스티커를 달고 전국으로 흩어졌다. (‘빠른우편’제도는 1994년부터 2006년까지 시행되었는데, 일반 우편물에 파란색 스티커를 붙이면 접수된 다음날 수신인에게 도착되었다. 물론 3-4일 정도 걸리는 일반우편보다 조금 비쌌다.)  


연애를 하던 시절에는 문자와 편지로 사랑의 세레나데를 남겼고, 결혼식 날에는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를 주례사제가 낭독해 주었다. 그 후 아이를 임신 했을 때는 태교일기 대신 태교편지를 썼고, 크리스마스에는 해매다 선물과 함께 산타클로스 이름으로 쓴 편지를 아이의 머리맡에 두었다. 아이에게 쓰는 산타클로스의 편지는 아이가 산타클로스를 믿었던(혹은 믿는 척했던) 5학년 때까지 이어졌다. 


아이가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때부터 열두 살이 되던 해까지 나는 산타클로스의 이름으로 아이에게 편지를 썼는데, 아이가 일곱 살 때는 사과편지를 쓰는 일도 있었다. 그해 어쩌다 편지를 빼먹고 선물만 머리맡에 두었는데, 선물을 펼쳐본 아이가 산타할아버지의 편지가 없다고 목 놓아 울었기때문이다. 나는 우는 아이를 달래며 어쩌면 편지는 오늘 밤에 도착할지도 모른다고 말했고, 아이가 잠든 밤 몰래 ‘편지를 놓고 가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사과편지를 써야했다. 물론 편지봉투에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라는 발신인의 이름을 써야했다.      

    

 - 다음에 계속 -

어느해 썼던 성탄 카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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