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면서 썼다
사실 처음에 회사에 들어와서 제안서 쓰기가 무서워서 안 쓰려고 피해 다녔다. 예를 들면 제슬린이,
제슬린: 레몬, 우리가 그때 컨택했던 00사 기억나지? 제안서를 보내야 하는데 너 뭐 생각나는 거 있어?
나: 음.. 없는데.. 한 번 생각해 보고 너한테 이메일로 보낼게.
그리고 보내지 않음...
그리고 또 다른 X사한테는 제안서를 보내야 하는데 그냥 있는 거 이것저것 엮어서 보냈다. (이것은 제안서가 아니라 그냥 복사와 붙여 넣기..)
그리고 이제 정말 제안서를 보내야 할 때가 왔다. B그룹은 해외 금융기관인데 우리 팀은 영국에 있는 B그룹 팀원들과 여러 번 온라인 미팅을 진행하고 엄청나게 많은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꼭 제안서를 보내야 했다!
처음이니까 해볼 수 있는 만큼만 해보자..
혼자 이렇게 생각했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싶지도 않았고 처음인데 어차피 어설픈 건 당연하니까. 천천히 시작했다. 일단 회사 내부 직원들이 만든 제안서들도 보고 다른 마케팅 대행사 제안서들도 훑어보고 한 두 개 제안서를 정해서 따라서 만들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다) 그러다가 모르겠는 부분은 내버려 두고 (?) 또 마지막에 예산 플랜을 해야 하는데 예산을 짜다가 모르겠는 것이 있어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나름대로 만든 제안서를 제슬린에게 보냈다.
나: 제슬린, 제안서 보냈어. 근데 다 못 했어. 모르는 것들 있었는데 그냥 비워뒀어.
제슬린: 응~ 고마워.
2시간 뒤, 제슬린에게 전화가 왔다.
이게 제안서야???? 왜 다 완성 안 했어?
전화를 받자마자 제슬린이 소리 질렀다.
나: .... (아까 괜찮다고 했으면서...).. 모르겠는 건 놔뒀어.
제슬린: 누가 내버려두래?
나:....
제슬린: 모르는 게 있으면 찾아서라도 완성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나:... 모르는 걸 어떡해..
내가 너를 잘못 알았나 봐. 하기 싫어? 제안서 쓰기 싫냐구!
나는 니가, 우리가, 하루하루 배워간다고 생각했어.
내가 잘못 생각 한 거니?
모르면 안 할 거야? 포기야?
고백하자면, 제슬린이 그렇게 화내는 걸 처음 봤다. 오랜만에 엄마한테 혼나는 기분이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제슬린이 나를 계속 몰아붙였다.
나: 있지, 정말 미안해. 나도 너무 답답해... 나도 잘하고 싶어. 근데 모르는 걸 어떡하냐구! 나 회사에 들어온지도 얼마 안 됐단 말이야.
나도 모르게 울먹이면서 말했다...
제슬린: (한숨을 쉬며) 알아. 너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거. 근데 니가 안 하면 누가 해? 내가 할까? 한국 마켓은 니 담당이잖아. 너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단 말이야. 니가 얼마나 일했든, 어떤 경험이 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너 말고는 할 사람이 없어, 레몬아. 우리가 연락하고 있는 다른 협력 회사들도 있고 담당자들도 많잖아. 모르면 물어봐. 그리고 배워. 하면서 배우기로 했잖아.
나:. 알았어... 다시 해서 보낼게...
제슬린: 알았어. 고마워...
나는 다른 회사 담당자들에게 다 연락을 돌리고 하나씩 정보들을 수정해나갔다. 마지막으로 완성한 제안서를 제슬린에게 보냈다. 제슬린의 매서운 말들과 마지막까지 나를 달래는 말들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슬린이 나를 다 키웠다. 제슬린에게 혼나면서 완성한 첫 제안서 이후로 제안서 쓰기가 더 이상 겁나지 않았다. 뒤돌아보면 어리숙하기만 하다. 남들은 척척 잘하는데 혼자 애같이 굴었다.
*제안서 쓰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