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모르겠고 내 집은 있습니다> 김민정 지음, 21세기북스
*감사하게도 21세기북스에서 책을 보내주셔서 읽게 되었다.
프리랜서에, 비혼, 3묘와 살아가는 나는 저자와 비슷한 점이 많아서(나이 빼고;;) 더 공감하며 읽었던 것 같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 Home Sweet Home(즐거운 나의 집)
집이라는 공간은 딱 저런 노랫말과 같은 곳이 아닐까. 내가 쉴 수 있는 벗과도 같은 공간.
살아가는 데 "의식주"가 꼭 필요하다고 일컬어지지만 그중에서도 집은 제일 비싸고 제일 장만하기 어렵다. 특히나 비혼에, 비정규직인 나 같은 사람에게는 더더욱. 필요하다는데 갖기는 어려운 아이러니한 저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이것저것 알아보던 요즘, 선물처럼 이 책을 만나 무작정 집을 사야겠어!가 아닌, 나만의 인생 로드맵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내 집을 갖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비혼에 비정규직 여성인 나에게는 더 그랬다. 나는 생각을 바꿔보기로 했다. 혼자서는 집을 갖기 힘드니 결혼을 고려할 게 아니라 비혼의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라도 집이 필요하다고. 가장 불안한 사람이 가장 절실한 법이니까. 그렇게 나는 내 집 마련 레이스의 출발선에 섰다.
<결혼은 모르겠고 내 집은 있습니다>
나 역시도 "내 집 마련은 딴 세상 이야기라"고 생각해왔다. 어릴 때는 치기 어린 마음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집에 너무 집착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다. 내 인생에서 결혼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내 한 몸 뉘일 곳 없을까 생각하면서 살았다.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저자의 저 말이 딱 맞았다. 비혼의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라도 집은 필요했다. 안정적인 거주 기반에서 나 자신을 돌아볼 여유도, 내 주위를, 내 일과 내 삶을 돌아볼 여유도 나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집이 아닌 이상, 언제 집주인이 월세를 훅 올릴지도 모르고, 언제 계약을 해지 당할지도 모른다. 아직까진 좋은 집주인들을 만나서 그런 걱정 크게 없이 살아왔지만 언제 어떤 일을 겪게 될지는 누가 알겠는가. 더구나 나이 들어 일도 제대로 못하게 되면 그땐 집세 어떻게 벌고? (나이의 무서움이란 이런 건지, 점점 별의별 생각들을 안 할 수 없게 된다.)
아무튼, 1인 3묘 가구인 나는 현 거주지의 재건축 문제로 몇 년 안에 집을 비워줘야 하게 되면서 이제야 긴장감을 갖고 내 집 마련의 레이스에 섰다. 아, 나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비슷한 비혼 여성이 자기 만의 공간을 만들어가고, 그 공간에서 자기 만의 삶을 꾸려가는 이야기는 "야 너두 할 수 있어!"라며 내게 힘을 주었다.
이 책은 단순히 어느 프리랜서 방송작가의 내 집 장만기가 아니다. 비혼 여성의 집이라는 공간, 비혼 여성의 삶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단순히 숙식을 해결하고 추위와 더위를 피하고 그런 건물의 용도로서가 아니라 내 삶을 보다 잘 꾸려갈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집을 고민하게 했다. 저자도 시작은 그랬을지 모른다. 더 이상 남의 집에 눈치 보며 살지 않고 편안한 내 쉼터를 찾고 싶었을 것이다. 동갑내기 동료가 집이 있다는 얘기에 뽐뿌를 받았을 수도 있고. 하지만 그 집을 장만한 뒤 저자는 '내'가 '존재'하는 집을 고민하고 그런 집을 만들어간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포기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어떤 것이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저자는 페미니즘을 만나고, 비혼 여성으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 되고, 비혼의 가족계획까지 생각하게 된다.
나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고민의 방향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과거의 나는 '생존하기'만을 고민했었다. 내가 방송작가를 계속할 수 있을지, 앞으로는 또 어떻게 벌어먹고 살아야 할지. 하지만 이제는 '존재하기'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나는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할까.' '내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결혼은 모르겠고 내 집은 있습니다>
나는 앞의 여러 꼭지들도 재미있었지만, 저자의 비혼 가족계획 부분을 많이 공감하며 읽었다.
("잼 뚜껑 하나에 남자를 떠올리"는 날도 있고 "나 오늘 한 마디도 안 했네?" 하는 날도 있고, 이러다 "고독사라는 헤드라인"의 주인공이 나이면 어떡하지 걱정할 때도 있는지라 정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더랬다.)
"야, 세상에 너 혼자 점으로 '콕' 남는데 이상하지 않냐?" 라는 저자 아버지의 말에 왜 내가 찔리던지.
나 역시도 그처럼 인간관계를 위한 노력을 '불필요한 인맥 관리'라 치부한 적이 있었다. 누군가와 갈등이 생기면, 그래서 내가 피곤해지면 가차 없이 잘라버렸다. 100만 년 만에 연락해도 아무렇지 않은 가족과 몇몇 친구들만 남고 이제 내 인간관계도 저자 아버지의 말처럼 콕 찍힌 점 몇 개가 전부가 되었다. 어느 순간 주체할 수 없이 늘어난 관계에 숨이 턱 막히고 버거워질 때가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관계에 서툴었던 나는 전부 버렸다. 물론 거의 집에서 일하고, 일이 몰리면 두어 시간 나가서 커피 한 잔 마시는 일도 부담이 되어버리는 날들이 몇 년간 지속되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정리된 것도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고립되었다 느껴질 정도는 아닌 내게 딱 적당한, 느슨한 관계는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잘 이어가는 게 관건이겠지. (집은 없지만, 가족계획은 살짝 꾸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저자처럼 노력도 해야 할 테고.
그러다 문득 비혼에게도 가족계획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비혼이기 때문에 가족계획이 필요하다. 우리는 제도 밖의 새로운 가족을 꾸려야 하니까. 세상이 가르쳐 주지 않은 길로 가야 하니까. 집과 돈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절대 잘 살아갈 수 없다. 1인 가구 여성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불안한 주거권도 빈곤한 경제력도 아닌 사회적 고립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지속 가능한 비혼 생활을 위해서는 '혼자 살기'의 능력만 키우는 게 능사가 아니다. '함께 살기'에 대한 고민도 그만큼 중요하다. 비혼이라고 말하는 것이, 단순히 결혼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이 아니라 하나의 연대 선언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결혼은 모르겠고 내 집은 있습니다>
내가 이 책의 포인트라고 생각한 부분.
이 책을 읽다 보면 안정적인 주거 목적의 집을 장만하고도 우울했던 날들, 이후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삶을 대하는 저자의 사고의 폭이 어떻게 넓어져가는지 그 과정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꼭지에 이르면 저자가 이제 확실히 집을 단순히 주거하는 곳이 아닌 삶을 영위하는 곳으로 만들어 가게 된 것 같다는 것이 느껴진다.
우리나라에서 내 집 장만은 투자라는 생각도 무시할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나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집이라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 저자의 삶이 무척 행복해 보였다. 좀 부럽기도 하고. :)
다만, 부동산 정보를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보니 구체적으로 내 집 장만을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다면 아쉬울 수 있다. 저자가 집을 어떻게 마련했고, 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주요 에피소드들을 겪었던 시기에 도움을 받았던 책 등이 간략하게 팁으로 나와 있지만 아무래도 정보 전달용 서적에 비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비혼 여성이 어떻게 자기 공간을 갖고 자기 삶을 만들어가는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그런 점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적합한 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의 핵심도 결국은 그것일 테니까.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이 책이 비혼의 삶에 관한 작은 이정표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십분 공감하는 바다. 비혼도 이젠 분명한 삶의 형태로 자리 잡고 있으니 이 책을 시작으로 더 많은 비혼 여성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이 소개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