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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JELLY Jun 04. 2022

끝날것을 알면서도 노력할 수밖에(영화:콜바넴)


 “엘리오와 올리버 중에 누가 더 서로를 사랑했을까?”


 이런 질문… 유치하긴 하지만요. 올리버가 결국은 자신을 떠날 것을 알면서도 사랑한 엘리오. 이런 관계에 있어서는 의미있는 질문일 겁니다. 엘리오가 더 가슴 아파했을 것으로 저는 보이는데요. 저도 엘리오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때가 있었거든요.


 이 영화 원작 소설의 제목은 ‘그 해, 여름 손님’. 올리버는 여름에 잠깐 왔다 가는 손님일 뿐입니다. 둘의 끝은 어쩌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헤어지지 않고 끝까지 가볼 수도 있었겠죠. 장거리연애를 한다던지, 올리버가 예정된 스케줄을 바꾸고 쭉 머문다던지…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관계를 이어가는 내내 곧 헤어져야 함을 올리버도 알고 있었고, 엘리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 둘은 사랑에 풍덩 빠져버립니다.


 ‘끝을 알고 만나는 느낌’을 아시나요? 저도 한 연애를 하는 동안, 내내 끝이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느 연인들처럼 설레임으로 시작한 관계는 맞지만, 그 사람도, 나도 첫 시작의 시점에는 전 애인이란 존재의 그늘 속에 있었죠. 그렇게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느낌으로 관계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 사람을 만나며 지난 상처를 훌훌 벗어던지고 사랑에 푹 빠졌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아니었죠. 


 분명 연애중인데, 마치 어제 이별한 사람처럼 울고 다니던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애인의 전애인과 관련되어있다보니, 단순한 상처가 되는 게 아니었어요. 미칠듯한 열등감에, 정신상태가 정상인 날이 없었죠. 게다가 애인과, 그의 전애인 모두 같은 캠퍼스에서 종종 마주쳤기 때문에 신경은 곤두섰습니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그의 전애인처럼 보이는 현상도 겪었구요. 하지만 우리 둘 모두 정말 대놓고 우리의 문제를 말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정말 큰 타격을 받은 일이 생겼습니다. 그 날은 하필 화이트데이였는데요. 화이트데이 날 아침부터 걸려오는 그의 전화는 이상하게 달갑지 않았습니다. 


 전화를 받았는데 그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어요. 기분이 안좋은거냐고 물어보니, 꿈을 꿨다고 했죠. 전애인이 나와서 어쩌고 저쩌고… 그 뒤에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 잘 기억이 안납니다. 하지만 ‘전애인 꿈을 꾸고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은 팩트였습니다. 그날 저는 캠퍼스를 쏘다니며 곳곳에 눈물을 뿌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못난 놈이 뭐가 좋았나 싶지만, 그때는 그사람이 내 세상이었거든요. 그래서 한참을 힘들어하고 난 뒤, 한가지 결심을 합니다. 그 사람이 더, 더 좋아할만한 사람으로 내가 변해가자고. 한 번 해보겠다고. 오기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 결심을 하는 순간에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 관계는 결국 끝이 날 것을. ‘노력'으로 그 사람이 나를 전보다 더 좋아하게 될 수는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도 동시에 알았습니다. 아무리 그가 나를 더 사랑하게 된다 하더라도,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만큼 그가 나를 사랑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한계. 그래서 언젠가는 이별이 올 거라는 것. 그 모든 걸 알았음에도, 저는 그렇게 해보기로 선택했습니다. 이유는… 그렇게 끝까지 가봐야 더이상 미련이 남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죠. 최선을 다해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의 이상형을 알고 있었는데, 그런 스타일로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말투, 패션 등 모든 것을 바꾸기 시작했고, 그에게 더이상 보채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사랑과 관심을 구걸하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더 좋아하는 관계라 항상 내가 더 애탔었는데, 그사람이 좋아하는 스타일대로 변신하되, 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사람보다 나에게 더 관심을 가졌고, 적당히 바빠지려 했으며, 슬픔에 빠져있지 않았습니다. 슬퍼할 시간에 노력했습니다. 


 눈에 띄는 노력 덕에, 점점 느끼기 시작했죠. 이사람의 마음이 나에게로 기울고 있다는 것을요. 그런데 내 목표가 이루어질수록 찾아오는 공허함도 있었습니다. 이렇게까지 해야만 그가 나를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이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그사람이 나를 점점 좋아할수록, 먼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올수록, 그 공허함에 제 마음도 차츰 변해갔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기로 했습니다. 끝을 알고 있지만 이어가는 관계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실감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예정되어있던 저는 예정대로 돌아갔습니다. 어떻게든 더 있을 수 있었지만 그러기를 선택하지 않았죠. 우리는 서로 보고파했고, 그가 나를 보러 오기도 했지만, 결국 얼마 안있어 헤어집니다. 그에게 절대 전화는 하지 않았지만, 유치했던 저는 ‘전남친에게 전화오게 하는 법’ 같은 걸 실행에 옮기며 그의 전화를 기다렸습니다. 그 방법대로 하니 전화가 오긴 오더라구요. 하지만 영화 속에서 올리버가 엘리오에게 전화하여 한 말이 재회를 원한다는 말이 아니었듯이 그의 전화도 재회를 원하는 전화는 아니었습니다.


 그사람이 좋아질수록, 그사람에게 상처받을수록 끝이 더욱 보였던 것처럼, 엘리오도 올리버가 좋아질수록 끝을 강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은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서툴게 감정을 폭발시키기도 하죠. 


당신이 안 갔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올리버는 가지 않겠다는 말을 끝끝내 하지 않습니다. 그저 안아주기만 할 뿐이죠. 둘이 헤어질 때의 표정을 보면 올리버도 많이 상심한 듯 보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거기서 멈춥니다.


 한여름같이 뜨거웠던 엘리오의 첫사랑. 그것이 휩쓸고 지나간 후 상처는 컸습니다.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큰 상처는 받지 않아도 됐을 텐데. 끝을 알고 있었기에 진작에 멈출 수 있었을 텐데. 굳이, 굳이 엘리오는 그 한여름을 맛보고 맙니다. 그 여름이 끝나고 결국 쓰라린 겨울을 맞이하고야 말죠.


 끝날 것을 알아도, 우리는 사랑해야 할까요?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끝이 보이더라도, 그럼에도 사랑해야한다고요. 생전 느껴보지 못했던 다양한 감정을 느꼈지만, 상처받으면서도 저는  용감해질 수 있었습니다. 덩굴이 엉킨것과 같은 관계 속에서도 꿋꿋하게 솔직한 내 감정대로 길을 걷고자 하는 용기. 그에 따르는 아픔과 슬픔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용기. 그 과정에서 글을 쓰며 슬픔을 분출하는 방법도 배웠구요. 엘리오도 저도, 그 기울어진 관계를 통해 조금더 여물은 예술가에 가까워졌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아픔은 예술이 되면서 세상에 복수한다’고 생각합니다. 음악을 하던 엘리오도, 글을 쓰던 저도 예술을 통해 이미 아픔이 건강한 방식으로 치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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