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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JELLY Jun 16. 2022

살인적인 후회와 죄책감으로 얼룩진 (영화: 모리스)


 ‘모리스’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클라이브가 그저 창밖을 내다보는 장면’입니다. 잔잔해보이는 장면이지만 이 영화를 처음부터 봤다면 굉장히 강렬한 장면으로 보일겁니다. 참고로 이 영화는 퀴어 영화이며, 휴 그랜트의 매우 젊은 시절을 볼 수 있는 꽤 옛날 영화입니다. 20세기 초 영국 사회에서의 동성애를 다루고 있죠. 시대적 배경만 봐도 얼마나 사회가 동성애를 금기시 했는지, 동성애자들에게 사회적 압박감이 얼마나 심했을 지 아시겠죠? 클라이브와 모리스는 기숙학교를 다니며 사랑에 빠지지만, 동시에 그 사랑의 위험성에 대해서 두려워합니다. 특히 클라이브는 변호사가 될 야망을 가진 젊은이었기에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죠. 두려움에 굴복한 그는 결국 다른 이들처럼 여성과 결혼을 하고 잘나가는 변호사가 됩니다. 모리스와는 친구로 지내기를 선택하죠. 모리스는 클라이브를 너무 사랑했기에 실연의 고통을 견디어내며 그의 친구로 남아있게 됩니다. 마음 속으로는 여전히 클라이브를 사랑하고 있죠. 



 마지막 장면 속 클라이브 얼굴은 표정은 절대 돌이킬 수 없다는 후회와, 용기가 없어 진짜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줬다는 죄책감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실제로는 무표정에 가깝지만, 눈빛에서 많은 걸 읽어낼 수 있는 장면이죠. 평생 자신의 곁을 맴돌며 자신만 바라볼 것 같던 모리스가 새로운 사랑에 들떠있는 모습을 본 직후입니다. 압박감에도 굴하지 않고 진짜 사랑을 찾아떠나는 모리스와, 친구로라도 모리스를 곁에 두고 싶은 클라이브의 대조적인 표정이 참 볼만 합니다. 아마 클라이브의 인생에 있어 이보다 더한 절망감은 못느껴봤을 겁니다. 그 어떤 배신감보다도 더 견디기 어려운 후회와 죄책감을 그는 느꼈을 겁니다. 그 순간부터 클라이브의 지옥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영화는 거기서 끝이 났지만요.


 어리고 철없던 시절 만났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저는 남자친구에게 공주대접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이기적인 여자였습니다. 상대의 소중함을 전혀 몰랐던 저는 어느날 밤 끝내 그의 입에서 “헤어지자”는 말을 나오게 하고 맙니다. 헤어지자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어떨지 몰랐었는데, 처음 들어본 선언의 여파는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한 번도 사랑 때문에 울어본 적이 없던 저는 진짜 진하게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몰랐습니다. 그렇게 그 친구에게 빠져있었던 것을요. 탈진할 만큼 울어서 근처 사는 선배가 걱정되어 저를 보러 올 정도였습니다.  


 그때 생각한 것은 단 한가지였습니다. 그에게 죽을만큼 미안하다는 감정을 느낀다는 것. 그게 살인적인 죄책감이 되어 나를 짓눌렀습니다. 소중한 사람이 항상 당연히 내 곁에 있을 것으로 여기다가, 그 사람이 지쳐 떠나가버렸을 때, 내가 손쓸 수 있는 것이 더이상 없다는 사실에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배신감과 같은 과격한 감정만이 견디기 힘든 감정인 줄 알았었는데, 누군가에게 미안하다는 감정이 그렇게 견디기 어려운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이런 메모를 끄적였던 것 같습니다.


한 번만, 

딱 한번만 행복이 다시 온다면, 

다시는 놓치지 않도록 내가 잘 할거야.


 힘들어하는 나를 결국 그는 다시 받아줬지만, 그는 이전에 비해 차가워졌고 나에게 막 대했으며 나는 완전한 을이 되어 그의 비위를 맞췄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죠. 내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요. 그가 나에게 막 대할수록, 내가 그에게 잘해줄 수록 내 죄책감은 점점 덜어지고 있었습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습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그를 소중히 대해주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다 다시 헤어지게 되었고 또 힘들었지만, 덜어진 죄책감 덕에 저는 점점 괜찮아졌습니다. 곧 새로운 사람과 달콤한 썸을 타느라 금세 그 친구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내가 새 연애를 시작한다는 것을 그가 알게된 순간부터, 그의 지옥이 시작되었나 봅니다. 그도 나처럼 어렸기에 ‘언제까지나 내가 자신에게 매달릴 줄’ 알았던 거죠. 소중함을 놓치고 나니 그사람도 어마어마한 후회의 여파를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이미 제 곁에 누군가 있으니 어찌할 순 없어도, 남아있는 미련 때문에 계속 연락을 하고 질척거렸습니다. 제가 미동도 하지 않자, 그는 마지막으로 부탁했습니다.

“그 노래 들려주면 안될까? 네가 나랑 만나면서 만들었다는 노래.”

 그 친구를 만나던 시절, 만든 노래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이야기로 노래를 만들었다고 해도 그친구는 당시에 크게 관심이 없어보였죠. 한 번도 들려달라고 하지 않았고 저도 잊고 있었습니다. 

“아니. 들려주지 않을래.”

“제발… 한번만 들려줘…”

“아니. 너를 생각하며 만들었지만, 절대로 너에겐 들려주지 않을거야.”


 제 마음은 이미 닫혀있었습니다. 들려줄 수도 있었지만, 이상하게 절대 그에게만큼은 그 노래를 들려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리 둘은 함께한 시간을 통해 당연한 사람은 없다는 것과, 소중한 사람이 곁에 있을 때 지켜야한다는 것 등을 배웠습니다. 그 사람을 통과한 나는 더이상 공주대접 받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여자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되었든 연애를 하는 동안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다시는 죄책감을 키우지 않습니다. 
 클라이브가 모리스를 떠나보내며 지었던 표정 같은 건,
다시는 짓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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