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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JELLY Jun 16. 2022

환상으로 시작해 서툴게 도망친(영화 이토록 뜨거운순간)


 아직도 안고 사는 몇 가지 대사들을 심어준 제 최애 영화는 배우 에단 호크가 감독을 맡은 ‘이토록 뜨거운 순간'입니다. 이 영화는 제가 몇번이고 몇번이고 반복해서 봤었고, 제 첫 책의 프롤로그에도 여기 나오는 대사를 인용했습니다. 


 영화의 초반부는 두근대는 음악과 함께 쭈욱- 풋풋한 사랑의 시작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너무나 설레게 시작한 것과는 다르게 생각보다 금방 위기를 맞이합니다. 이 영화의 여자주인공 사라는 욕 먹기 딱 좋은데요. 헤어지고 싶어하는 사라의 설명은 두리뭉술하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남자주인공 윌리엄은 영문도 모르고 힘들어합니다.


 사라와 제가 대화를 나눈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저는 그녀의 마음을 알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녀가 하는 말들이 저는 다 이해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자기가 먼저 이별을 원했고, 윌리엄이 아무리 매달려도 만나주지 않으면서도, 갑자기 윌리엄에게 생일선물을 주죠. 다시 만날 생각도 없으면서 윌리엄에게 희망고문을 합니다.


 덜컥 어떤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는데, 마음이 빨리 식어버린 적이 저에게도 있습니다. 저도 아마 그에겐 사라같았을 겁니다. 처음의 시작에 비해 계속 확신을 주지도 못했고, 분명 이 관계는 뭔가 아닌데 뭐가 아닌지도 모르겠었고, 저는 그사람에게 불안한 여자친구였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나를 많이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너무 상처받을까봐 쉽사리 놓지도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빨리 관계를 끝내는 게 그에게도 더 좋았을텐데 싶지만, 그때는 어쨌든 그랬습니다. 윌리엄이 이별 후에 미친 사람처럼 힘들어한 것처럼 그사람은 만나면서도 힘들었을 겁니다. 도대체 왜 우리의 관계는 그래야만 했을까요?



 사라는 예전과 같은 상처를 더이상 스스로에게 주지 않는 성숙한 사람이 되고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윌리엄에게서 상처받을 것 같은 조금의 징조만 보아도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자기 머릿속에, 상처줄 윌리엄을 미리 만들어놓고, 거기서 벗어나 자유로울 자신을 만들어갑니다. 자신의 마음에 찬물을 부어 식혀버리죠. 대단한 운명의 사랑처럼 다가오는 윌리엄을 부담스러워합니다. 사라의 사랑이 빨리 식어버린 이유와 저의 이유는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그사람은 학교 부회장이었고, 교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핵인싸에, 모범생이자 엄친아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내 주변의 누구나처럼 저도 그를 동경했었죠. 멋있는 선배라고 생각했고,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죠. 어떤 가수를 빼다박은 듯 닮았었고, 그래서 그런지 인기도 많았습니다. 방송부였던 저와 회장단 소속이었던 그는 방송실에서 접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그냥 아는 선후배 사이였고, 선배가 학교를 졸업한 후, 우리는 연인으로 발전했습니다. 정말 풋풋하고 청춘드라마같은 시작이었지만 어긋나기 시작한 건 저 때문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그를 만나는 동안 그사람에 대한 동경의 힘으로 연애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동경하던 사람을 연인으로 만나고 있다는 그 사실이 벅찼습니다. 실제로 데이트를 하면 그 사실 때문에 좋은 건지, 그 사람이 정말 좋은 건지 헷갈렸습니다. 사실상 실제의 그 보다는 제 머릿속에 만들어놓은 그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윌리엄의 대사처럼 생각했어요.


그냥 거기 앉아서 생각했어요. 이런, 기도한 그대로잖아.

 

 저는 사라와 다르게 두려움은 없었으나, 머릿속에 기대한 그 사람이 실제 그 사람이길 바랐습니다. 윌리엄이 대단한 사랑을 하는 것처럼 행동하듯, 내 머릿속도 환상으로 가득 찼죠. 그사람 때문에 상처받을 것 같아서 두렵진 않았지만, 그사람이 내 환상과는 다르다는 것이 문제가 됐죠. 당연히 그사람은 내가 상상하던 모습과는 다른 면이 많았습니다. 그걸 알게 되면서 갑자기 훅 마음이 식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야 하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사람이 너무 힘들어할 것을 알았기에, 쉽게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마음은 떠났지만, 그냥 붙잡고 있었던 거죠. 


 영화 마지막 즈음에, 시간이 흘러 헤어진 둘이 웃으며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사라는 말합니다.


네가 너무 강렬했던 것 같아. 넌… 아주 강렬했어

 영화 대사에 빗대어 그때의 저를 변명해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환상이 너무 강렬했던 것 같아. 그래서 그게 환상일 뿐이란 걸 깨달았을 때, 서툴게 도망친거야. 내가 스스로 만들어놓은 너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어.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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