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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경문 Jan 05. 2022

멸치처럼

그대여 마음을 우려내지 마오

새해 주말, 아내와 함께 전통 수산시장을 찾았습니다.


이상하게 저는 시장에 가면 늘 기분이 좋습니다. 어릴 적 어머니 손을 잡고 거닐었던 그 손길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제가 집에서 학교로 가는 길의 중간에는 시장이 있었습니다. 다른 길도 있었지만 저는 늘 시장을 거쳐갔던 기억이 납니다. 시장에는 언제나 활기가 넘치고 구경할 거리들이 있어 즐거웠습니다.


이런 어릴 적 기억이 오버랩될 틈도 없이 눈앞에 펼쳐진 신선한 식재료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우~와, 이 꽃게 좀 봐"

먼바다에서 밭에서 난 이 많은 재료들이 우리 집 식탁에 오르기까지 각자 역할해주신 분들의 수고가 떠오릅니다.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냉동실에 멸치가 떨어진 지 오래여서 요리할 때 영 불편한 게 아니었습니다.

아시겠지만 국을 끓이거나 육수를 낼 때 멸치가 필수니까요.


그 많던 멸치가 다 어디로 간 거지?


멸치는 시원하고 짭조름한 육수를 선사합니다. 모든 요리의 시작이고, 기본이죠.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도 이렇게 시원 짭조름한 육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몇 해전부터인가 삶이 푸석푸석하고 뭘 해도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이렇다 열정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저에게서는 더 이상 삶의 육수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비슷한 말로 번 아웃 증후군이라고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뭐든 열정적으로 했습니다. 연애도, 친구도, 대학교 공부도 또 회사생활도요.

멸치를 여기에 왕창, 저기에 왕창 넣었습니다. 회사 생활에서 더없이 욕심을 내면서 멸치를 팍팍 넣어 찐 육수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부장님 요리에도 조금, 차장님 요리에도 조금, 여기저기 조금씩 나눴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도 멸치가 다 떨어져 버렸습니다.


아이와 놀아도 영혼이 없고, 회사일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흔한 취미도 하나 만들어 놓지 않고 뭐했을까 싶었습니다.


15년간 집과 회사를 번갈아 가며 몸과 마음을 우려내고, 또 우려내서 이제는 더 이상 우러나올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멸치가 떨어져 버렸습니다.

부장님께서 여쭤 봅니다.

"이게 다 뭔가?"


제가 대답합니다.

"멸치입니다. 제 육수는 정말 진합니다."


부장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넣어 두게. 그리고 두 개씩만 꺼내도록 해."


30년 동안 천천히 우러날 수 있도록 말이야


젊은 날의 저를 다시 만난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마음속의 멸치를 한 번에 다 써버리지 말라고요.


이제는 멸치를 찾아 나섭니다.


멸치는 바다에 산다고 책에서 봤습니다. TV에서도 봤습니다.

그래서 멀리 가려면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큰 배도 있어야 하고, 그물 던지는 법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배를 사려고 돈도 열심히 모으고,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그물 던지는 법도 배웠습니다.

그런데 날씨도 좋아야 하고, 오래가야 하니까 식량도 있어야 하고 준비는 끝이 없었습니다.


요가를 하던 어느 날 아침, 번뜩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마음 저 마음 떠오르는 내 마음속이 "바다"였습니다.

여태껏 멸치를 잡으러 "그 바다"로만 가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물로 싹쓸이를 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소설책 넘기는 소리, 따뜻한 커피를 호로록하는 순간,
가을에 낙엽 밟는 느낌, 봄에 눈처럼 내리는 민들레까지


이것들이 제가 멸치를 잡는 방법입니다.

특별한 일상이 나에게 멸치를 한 마리, 두 마리씩 채워주었습니다.


여기저기 보물찾기 같아 일상이 즐거워졌습니다.

오늘은 어디에 보물이 있을까? 이제 내 주변 여기저기에 숨겨진 멸치를 찾아봅니다.


저마다 멸치잡이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할 때 멸치가 생기실까요? 언제 까지 먼바다에 나갈 준비만 할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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