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의 일기장
살아간다는 건 기억 속에 일기를 남기는 것일까?
언제 어떻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말이다.
기억 속의 일기는 늘 나쁜 일만 기록된다. 근수의 기억 속에 여름이 그 어느 여름날 보다 덥게 남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이 작은 공간 작은 세상에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난다. 소나기가 지나면 더 더워진다. 날씨가 더우면 얼음이 많이 필요하다. 갑작스럽게 얼음을 다 써서 난감했던 기억이 난다. 여 사장님이 근수를 부른다. 또 부르는 걸 보니 심부름이다. “지금 얼음이 없으니 좀 사 와야겠다”며 짜증스러운 말투로 근수에게 말한다. 근수가 난감한 듯 “예?”라고 답한다. "여기서 시장 쪽으로 가면 얼음을 파는 곳이 있으니 지금 사 와야겠다"라고 여 사장님이 말한다. 시큰둥한 목소리로 "알겠습니다"라고 답하고 근수가 커피숍을 나선다.
근수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이러다 성격 나빠지는 거 아냐?” 이런 심부름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길어야 한 달인데 참아보자며 얼음 파는 가게에 도착했다. 얼음 가게가 이렇게 바쁘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얼음 값을 지불하고 투덜투덜거리며 걷다가 그만 얼음이 땅에 떨어졌다. 얼음 덩어리가 크기도 하고 땀이 나서 미끄러져 버린 것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근수는 가장 가까운 친구가 생각났다. 주머니에는 공중전화를 걸 돈도 없었다. 어떻게 하지 고민을 했다. 가까운 공중전화로 일단 걸음을 옮겼다. 이래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나 보다. 누군가 공중전화를 사용하고 남은 돈을 쓸 수 있게 공중전화의 수화기를 끊기지 않게 올려 두고 간 것이다. 잔액은 다시 돌려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 인지는 모르지만 너무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얼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친구가 집에 있었다. “여보세요! 저는 경준이 친구 근수인데 경준이 있습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친구의 아버지에게 말을 한다. “ 그래 근수구나! 경준아!" 라며 친구 아버지가 경준이를 부르시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경준이가 "근수니?" 라며 전화를 받는다. "나 아르바이트하는 거 알지?" 라며 급히 말한다. "응” 이라며 경준이 답한다. "내가 지금 얼음을 사서 가려다 그 먼 깨뜨려서 얼음을 사야 되는데 지금 돈이 하나도 없는데 어쩌지?" 라며 풀 죽은 목소리로 근수가 경준에게 말한다. "어쩌다?" 라며 묻는다. "이유는 묻지 말고 돈 있으면 좀 빌려줘?"라고 말한다. "지금 어딘데?" 라며 경준이 묻는다. "너희 집 근처에 시장안쪽 얼음 파는 곳이다"라고 말한다. "그래 거기서 기다려" 라며 급히 전하를 끊는다. 근수는 경준이 올 때까지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린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렇게 시간이 길게 느껴질 수 있을까? 수호천사란 이런 것이지 하고 짠하고 경준이 나타났다. 경준이 자기 일처럼 땀을 뻘뻘 흘리며 근수를 부른다. "야! 이거 안 갚아도 되니까 얼른 얼음 사서 가라"라고 말한다. 고맙다는 말도 안 나왔다. 꼭 필요할 때만 찾는 것처럼 보일까 봐 너무 미안하고 고마웠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잊히지 않는 일이 있나 보다. 그래도 많이는 아니지만 열심히 잘 살았구나!라는 합리화라도 해야 좋게 기억될 것 같았다. 경준이는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근수에게는 베푸는 사람이다. 어쩌면 근수가 베풀 수 있는 기회도 잘 주지 않는 친구였다. 근수도 이런 친구에게서 베푸는 방법을 알아가고 있었다. 시간이 약이 되어 줄지는 모르지만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그래도 그 아픔과 서러움마저도 되새김질하면서 살 수 있다는 건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그것을 잠시 잊게 한다는 것이었다. 아픔도 때론 사람의 감정을 되살려 준다. 쌓이는 기억 속에서 얻어지는 고마운 것들이 다시 내일로 이어지는 것이라 믿었다.
여름은 카페에서는 제빙기의 수난시대이다. 쉴 새 없이 24시간 얼음을 만들어 내는 기계가 성할 리가 없었다. 오죽하면 얼죽아라는 신조어가 생겨났겠는가! 얼어 죽어도 아이스아메리카노란 뜻이다.
신기할 정도로 이런 말을 잘 만들어 낸다. 계절과 상관없이 제빙기는 온몸을 불사르고 견딘다.
이런 날씨인 여름은 더욱더 그렇다.
근수와 희정이 성수기인 여름 아침 출근과 함께 아이스 음료가 많이 판매되고 있을 때쯤, 드디어 탈이 났다. 이게 무슨 일인가! 제빙기가 동작을 멈추었다. 한동안 잠잠하던 카페 안의 기계가 고장이 나 버렸다. 몇 천 원짜리를 박리다매해야 그나마 버틸 수 있는데 이렇게 기계가 하나라도 고장이 나면 목돈이 나간다. 그렇기에 근수와 희정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에 제빙기가 고장 나면 아이스로 된 메뉴는 판매할 수가 없다. 지난 20대의 아르바이트 생이었던 근수가 옛 일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버티고 이겨내야 하는 것이 장사꾼의 운명이다.
어쩌겠는가! 둘의 운명이 그러하다면 기억 속에 남을 일기장의 한 페이지로 남길 수밖에...
근수가 과거의 일을 회상하며 아르바이트생을 부르려다가 바로 멈칫한다. 예전처럼 큰 덩어리 얼음을 톱으로 잘라 판매하는 곳도 잘 없지만 가까운 슈퍼마켓에 가면 각 얼음을 판다. 옛 기억이 떠 올랐는지 자식 같은 아르바이트생에게 심부름을 시킬 수는 없었다. 희정에게 "각얼음 사러 갔다 올게" 라며 그때와 같은 기분으로 카페를 나선다. 더운 날 큰 얼음덩이를 들고 커피숍을 향했던 그날의 기억과 지금의 모습이 묘하게 겹치며 지나간다. 얼음을 들고 돌아가는 모습은 많이도 닮아있었다. 지금의 일들은 과거보다 더 나은 일들과 오버랩되길 바라본다. 편리함을 돈으로 바꾸며 사는 것들이 세상의 변화와 일치해져가고 있었다. 일이 일어났을 때와 해결한 후는 많이 다르다. 뭔가 얻어맞은 것처럼 울화가 올라왔다가 다시금 제자리로 평정심을 찾아가는 모습들. 사람의 마음이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지나간 것들은 현실을 마주하는 속에서 지워진다. 희정의 긍정적인 생각이 근수를 위로한다. "자기야! 속이 상해도 어쩌겠어, 더 열심히 해서 성공하자"라고 희정이 말한다. 물론 다가오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더 큰 꿈을 위해서 작은 것이라 해 두자고 했다. 근수의 소심함을 일깨우는 건 역시 곁을 지키는 희정뿐이었다. 지금의 긍정이 내일을 만들어 줄 것이라 믿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던 하루의 길이도 똑 같이 흘러간다.
꾀 심각하게 흘러가던 작은 세상의 소용돌이도 멈추었다. 지난날의 아픔이 딱딱하게 굳어 버린 돌로 된 동상처럼 멈추어 있다. 어둠이 내리고 카페 안은 조용한 분위기를 만들어 가고 있다. 언제 그랬었냐는 듯 근수와 희정은 오늘도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며 웃는 연습에 빠져있다. 카페에 카공족이 몇 시간째 공부를 하고 있었다. 가끔씩 잠깐 커피를 마시 가는 손님들이 있었다.
이때 다 싶게 찾아오는 어두운 분위.
카페 문이 열리는 작은 종소리가 울린다. 50대쯤으로 보이는 손님이 들어온다. 이런 것은 직감이다.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 같은 느낌... 아니나 다를까 술이 얼큰하게 취한 손님이 혀 꼬인 말투로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주문을 한다. 희정이 카운터에 있다가 놀랜다. 갑작스러운 술 취한 손님의 방문으로 근수도 마음이 복잡하긴 마찬가지다. 근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문을 받는다. 희정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가만히 있어라며 근수에게 말한다. 근수는 차분히 그에게 다가서자 술 취한 손님은 무조건 "갖고 와!"라는 말만을 반복하며 반말을 한다. 결제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것 같은 손님에게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내어 준다. 한 모금을 마시더니 "앗! 뜨거워, 맛은 왜 이렇게 써" 라며 흥분한 표정으로 근수를 바라본다. 근수는 "아메리카노는 단것이 안 들어갑니다" 라며 말해 준다. 다리를 쩍 하고 벌린 건방진 자세로 근수를 손짓으로 부른다. 근수는 속으로 참자를 외치며 다가선다. 손가락으로 자리를 가리키며 앉으라는 표시를 한다. 근수가 마지못해 자리에 앉는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상한 말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내가 누군지 아냐?, 무슨 일을 하는지 아냐? 우스워 보이냐?"는 둥 술 취한 채 횡설수설이다. 근수는 차근차근 "카페는 학생들도 공부도 하고 조용조용 대화를 나누는 손님이 있으니 목소리릴 낮추라고" 조심히 이야기를 한다. 갑자기 근수를 째려보듯 노려보더니 "나도 인상이 더럽지만, 당신도 참 인상이 더럽다"라고 까지 한다. 더 이상 답할 가치도 없어 "그래요?"라고 짧게 답한다. 참아내는 것, 참아야 하는 이유는 한 가지이다. 생업을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지금을 참아야 한다는 이유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이때 공부를 하던 학생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던 손님들이 웅성거리자 근수가 억지로 손님을 밖으로 안내한다. 주머니에 들어 있던 구겨진 지폐를 꺼내 테이블 위에 두고 간다. 남은 잔돈을 챙겨 얼른 그 뒤를 근수가 따른다. 어찌 되었든 그 술 취한 손님은 카페 안 손님들과 근수와 희정에게 사건하나를 만들고 사라졌다. 손님 중 한 분이 다가선다. "아까 그분 지인이신 가봐요? 술 한잔 드시고 카페를 들리신 걸 보니 친한 분인 거 같던데요?" 라며 근수에게 묻는다. 근수는 한숨을 쉬며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다짜고짜 술주정을 부리고 갔다" 며 고개를 흔든다. 손님은 "사장님이 너무 조용히 대화를 나누시길래 지인인 줄 알았어요"라고 근수를 바라본다. "장사를 하다 보면 이런저런 일이 많이 생기는데 오늘이 그런 날인가 봐요" 라며 담담한 척 대답한다. "저 같으면 욕이라도 하고 쫓아낼 텐데 대단하시다며" 놀란 표정을 짓는다. "장사꾼이란 참..." 근수가 말 끝을 흐린다. 희정도 근수에게 "우리 자기 대단해!" 라며 "잘 참아줘서 고마워요"라고 근수에게 속상한 마음을 숨긴다. 그래서 근수는 늘 희정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나 때문에 늘 미안..." 직접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마음을 전할 뿐이다. 근수와 희정의 나쁜 기억이 주위의 사람들의 위로에 다시 뛰는 심장을 만들어 주었다. 늘 그렇다 사람이 사람에게 전하는 온전한 정은 힘들수록 강하다고 생각했다. 대학시절의 아르바이트를 잘 참고 이겨 내었듯 지금의 사건들을 이겨내면 반드시 좋은 날은 찾아올 거라 믿을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기억 속의 일기가 흐릿한 어느 날 근수와 희정은 서로를 바라보며 카페의 불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