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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혜경 Apr 02. 2023

필담(筆談)

1화

    처음 본 날 아이는 딱 한 문장을 썼다.


    공평했으면 좋겠어요.


    그때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던 사회복지사는 나와 눈을 맞추더니 고개를 한 번 저었다. 나는 그 고갯짓의 의미를 읽지 못했다. 사실 지금도 무슨 의미였는지 알지 못한다.


    공평, 좋겠다.


    나는 아이의 문장 어느 한 조각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응이 두 개나 들어갔는데도 네모나게 생긴 ‘공평’을 검지로 짚었다.


    “공평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무릎 위로 양손을 모아 쥐고 있던 아이는 입을 꾹 잠근 채 가만히 있었다. 그날은 펜을 다시 쥐지 않았다. 모든 글자를 네모반듯하게 썼으니 내 소임은 끝났다는 듯이.

    



    아이는 두 해에 걸친 학대 끝에 사명감 넘치는 어린이집 교사의 신고로 구조되었다. 부모 둘 다 경찰에 잡혀가거나 법정에 서는 일은 없었다. 누군가가 세운 학대 기준에 아이의 부모는 한참 못 미쳤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었다. 기준선에 닿지 못한 불성실한 가해자들은 아이를 버려두고 남남이 되었다. 가해자 둘은 감옥에 가는 대신 집으로 돌아갔는데 피해자인 아이가 돌아갈 집은 없었다. 복잡한 과정 끝에 아이의 책임 소재는 지역 아동복지관으로 넘어갔다. 복지관과 연계된 상담 기관의 상담사 1은 아이의 심리 상담을 맡게 되었다. 그게 나다.


    나와 아이의 상담은 기본적으론 필담(筆談) 형식이었다. 아이는 어느 날 불현듯 튤립반 교실 구석에서 연필로 성대 위를 그었다. 성대 안에 있던 아이의 모든 언어가 뾰족하게 깎인 연필 끝에 걸려 송두리째 뽑혀 나갔다. 인형 뽑기 기계의 갈고리가 인형 대가리를 위로 뽑아내듯이. 치명상은 아니었으나 그 뒤 아이는 말을 하지 못했다. 복지사는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라며 그게 아니면 여기가 아니라 병원에 가지 않았겠느냐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나는 키가 내 허벅지에나 겨우 오는 아이가 말을 안 하는 게 못 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생각했지만 말을 아꼈다.


    아이가 오려면 20분 정도 남아 있었다. 이번이 상담 2회기였다. 나는 1회기에 아이가 썼던 글자를 몇 번이고 읽고 또 읽다가 포털사이트의 국어사전에서 ‘공평’을 검색했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고름.


    내가 아는 한 아이는 여섯 살이었다. 여섯 살이 공평이라는 단어를 쓰는 건 이상하다.


    아이의 언어는 육체가 그러하듯 그 부모가 낳는다. 세상을 만나기 전의 아이가 사용하는 언어는 곧 부모의 언어라 해도 비약이 아니다. 공평은 아이의 부모가 심어 놓은 단어였다. 그들의 언어였다.


    이번에도 복지사에게 어깨를 붙들려 온 아이는 얌전히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끓였다가 식혀 놓은 맹물을 종이컵에 따랐다. 그리고 작은 접시에 담긴 티백을 함께 아이의 앞에 놓았다. 얘기하다가 목마르면 마셔도 돼. 머릿속에서 맴돌던 말은 튀어나오려다 목젖에 걸렸다. ‘얘기하다가’라는 말은 아이의 사정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문 채로 아이 맞은편에 앉았다.


    복지사가 나긋한 목소리로 아이에게 속닥거렸다.


    “얘기하다 목마르면 이거 마시면 돼. 이건 찻잎인데 요렇게 담그면 되고.”


    접시에 놓여 있던 티백이 복지사의 손에 들려 종이컵 안으로 잠겼다.


    아이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선생님.”

    “아, 알겠어요.”


    내가 조심스레 부르자 그 사람은 다 안다는 얼굴로 고개를 세차게 주억이더니 치료실 밖으로 나갔다. 어찌나 힘차게 흔들던지 덜그럭덜그럭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잘 지냈어?”


    아이가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손가락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응, 나 알아들었어.


    “우리 저번에 했던 얘기를 다시 해 볼까?”


    말끝을 명랑하게 끌어올리면서 아이의 앞에 볼펜을 놓아 주었다. 그리고 오늘 처음 국어사전에서 본 공평의 정의를 끄집어냈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고른 거. 이게 공평이래. 무슨 뜻인지 아니?


    아이는 펜을 쥐더니 종이에 또박또박 글자를 썼다.


    네, 모두 다 똑같은 거예요.


    반듯한 글자들을 두 번 읽고 나서 물었다.


    “정말 모든 게 똑같았으면 좋겠어?”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먹 쥔 손가락 사이로 펜이 삐주룩이 나와 있었다.


    나는 이런 문장에서 ‘모든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좁혀 가야 하는 사람이었다. 아이의 모든 것이 뭘까. 여섯 해를 산 아이 머리통 속 우주는 아직 행성 수준도 못 되었을 것이다. 이맘때 아이들의 세상은 무엇을 중심으로 도는가.


    “그중에 뭐가 꼭 똑같았으면 좋겠어? 하나만 고르면?”


    통통한 손가락이 꼼지락 펜을 매만지더니 이윽고 글자를 토했다.


    엄마랑 아빠.


    나는 엄마, 아빠 두 글자를 손가락 끝으로 더듬었다. 엄마와 아빠가 같았으면 좋겠다. 그게 공평이다. 


    “엄마랑 아빠가 달랐어?”


    아이가 또 고개를 흔들었다. 끄덕끄덕.


    모든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어. 엄마, 아빠도 다른 사람이잖아. 너와 내가 다른 것처럼.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이 말을 어떻게 풀어내야 아이의 언어로 이해시킬 수 있을지 막막했다.


    “엄마랑 아빠가 어떻게 달랐어?”


    아이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망설이다가 다시 펜을 꼭 쥐었다. 이번에는 문장이 아니라 그림이었다. 동그라미와 세모로 이루어진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쪽 동그라미는 큰 말풍선에 타래처럼 얽힌 말을 쏟아 내고 있었다. 맞은편 동그라미의 말풍선은 그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았다. 아이는 큰 말풍선을 가진 동그라미 아래 엄마라고 적었다. 한참 작은 말풍선 옆의 동그라미는 아빠였다. 아이가 그림을 그릴 동안 나는 촘촘히 내리깔린 아이의 속눈썹과 불룩한 볼을 보고 있었다.


    고개를 든 아이가 눈을 깜빡였다.


    “엄마는 말이 많았고 아빠는 말이 없었어?”


    나는 동그라미 두 개를 번갈아 짚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큰 말풍선 안에 마구 그린 검은색 타래는 말이 아니라 흉터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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