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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혜경 Apr 02. 2023

필담(筆談)

4화


    4회기를 하루 앞둔 날 복지사가 갑작스럽게 상담 센터에 들이닥쳤다.


    “이러지 말고 검사를 해야죠. 아니, 왔을 때부터 검사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게 순서잖아요.”


    왠지 모르게 평소보다 신경질적이었다. 어떤 문제가 여기까지 이 사람을 떠밀었는지 가늠했지만, 그네들 사정이니 알 도리가 없었다.


    나는 울컥 치미는 짜증을 억지로 눌렀다.


    “아이가 검사를 끝까지 할 만한 상태가 아니에요. 말을 안 하는 게 제일 문제긴 하지만 비언어적 표현도 억제되어 있고요. 이제 조금씩 행동이 나타나고 있으니까 적당한 때에 검사도 하면 되죠.”

    “그 적당한 때가 언젠데요?”

    “그걸 정하는 건 제가 아니에요.”


    복지사는 씩씩 거친 숨을 뱉으며 나를 노려보다가 “알겠어요.” 짓씹듯이 말하곤 나갔다. 쾅. 문이 요란하게 닫혔다. 나는 들고 있던 커피를 개수대에 부어 버렸다.     




    아이는 처음 온 놀이 치료실이 낯설고 불편한 듯 보였다.


    “오늘은 여기서 하고 싶은 대로 맘껏 하면 돼.”


    놀이 치료실에는 다양한 종류의 블록과 레고, 모서리가 둥그런 놀이 기구들, 수많은 책, 모래놀이 판이 있었다.


    “엄마랑 아빠를 떠올리면 기분이 어때? 여기서 표현해 볼까?”


    나는 야트막한 장난감 의자에 앉아 아이를 지켜보았다. 사실 의자에 앉았다기보다 엉덩이를 욱여넣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아이는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만져 보았고 어떤 건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모래놀이 판 앞에 다다른 아이가 멈춰 섰다. 대부분 아이들은 모래놀이 판 앞에서 거의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어린이집이나 가정에서도 볼 수 있는 다른 장난감들과 확연히 다른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놀이터 모래사장을 미니어처처럼 줄인 다음 눈높이가 맞는 대형판에 깔아 놓은 모양새이니 신기할 만했다. 물론 위에 깔린 모래는 교육용으로 안전 인증까지 마친 시판 제품이었다.


    아이가 천천히 손을 내밀어 모래에 손을 얹었다. 나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너는 모래로 어떤 이야기를 할까. 가슴이 뛰었다. 안 그래도 어제 함묵증을 다룬 논문에서 모래놀이가 유의미하다는 문구를 읽었기에 기대감이 차올랐다.


    그때 아이가 모래를 한 움큼 집더니 입을 벌렸다. 아이의 작고 붉은 혀를 보면서 입 벌린 건 처음 보는 것 같네, 멍청한 생각을 하다가 엉덩이에 끼웠던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안 돼, 안 돼!”


    아이가 허겁지겁 모래를 입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팔목을 붙들자 으응,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게 내가 처음으로 들은 아이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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