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세 번째 시간에 나는 볼펜을 치운 자리에 12색 색연필을 놓았다. 아이는 색연필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만졌다. 호기심 가득한 여섯 살의 눈빛이었다.
“이제부터 대답은 꼭 글씨로 안 써도 돼. 몸으로 이렇게 막 설명해도 되고, 그게 싫으면 그림을 그려도 되고. 물론 글씨로 쓰고 싶으면 글씨로 써도 돼.”
과장된 몸짓으로 설명하자 아이는 귓불 뒤를 두어 번 긁었다.
“엄마가 말이 많았을 때 기분이 어땠어?”
아이의 입술이 안으로 말려들어 갔다. 미간이 좁아지고 볼이 씰룩였다. 아이는 손가락을 움찔움찔하며 색연필 케이스를 열었다가 금세 다시 닫았다.
나는 아이가 발을 동동 구른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두 발 다 얌전히 허공에 떠 있었지만 내겐 확실히 발을 구르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가 갑자기 종이를 와락 구겼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통통한 손가락 아래 형편없이 구겨진 종이가 보였다.
“그랬구나. 잘했어.”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티슈를 뽑아 들고 아이의 옆에 앉았다. 불룩한 볼에 난 눈물을 티슈로 닦아 주자 아이는 반대편으로 얼굴을 돌렸다. 티슈를 아이의 앞에 두고 등허리를 한 번 쓸어준 뒤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이가 손가락을 꼬물대며 눈물을 닦는 것까지 보고 다시 종이를 내밀었다.
“아빠는 말이 없었다고 했잖아. 그건 어땠어? 아빠가 싫었어?”
깨끗한 새 종이를 내려다보던 아이가 이번엔 색연필 케이스를 열어 빨간색을 꺼냈다. 큰 동그라미와 큰 세모가 종이 귀퉁이에 앉았다. 이번엔 동그라미에 눈이 있어서 등을 보인 자세라는 걸 알았다. U자 모양으로 꾹 감긴 눈을 모서리에 고정한 큰 동그라미 뒤에 작은 세모 몸통을 가진 작은 동그라미가 섰다. 큰 동그라미는 등을 지고 있어서 작은 동그라미를 보지 못했다.
작은 동그라미 안에 더 작은 동그라미가 있었다. 아이는 더 작은 동그라미를 빨간색으로 가득 칠했다. 종이가 이렇게 넓은데 큰 동그라미와 작은 동그라미는 귀퉁이에 처박혀 있었다. 빨간색 색연필을 내려놓으려던 아이가 문득 생각난 듯 작은 동그라미 뒤로 펼쳐진 공간에 불규칙한 빨간 점을 찍었다. 점 같기도 했고, 부스러기 같기도 했고, 색 때문인지 핏자국 같기도 했다.
“이건 뭐야?”
아이에게 물었지만, 답은 없었다. 아이는 거기서 색연필을 내려놓았다.
아이를 중간에 끼고 나름대로 공평했던 부모 사이는 아이 아빠가 예고 없이 입을 다물면서 무너졌다. 아이 엄마는 응답받지 못한 말을 아이의 등에 쌓았다. 그녀는 아이가 어린 투정인 체 전하면 남편이 다시 한마디는 하겠지, 기대했다. 아이는 엄마의 욕망을 제 욕망처럼 전하는 데 익숙해졌다. 아이 아빠는 그때까지 공범이었던 주제에 아이를 등지고 입을 잠갔다. 복지사는 ‘그때쯤 아이 아빠도 뭔가 잘못된 거 같다고 생각했나 봐요.’라고 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아이 아빠는 갑자기 이유도 없이 그때쯤 아이를 불쌍히 여겼다는 것이다.
‘자기 혼자 살 궁리를 하기 시작했으니 그때 가서야 죄책감도 느낀 거죠.’
복지사 앞에서 그런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으나 가까스로 참을 수 있었다.
공평함이 무너졌다. 아이 아빠는 아이 엄마에 대한 기대를 버렸다. 아이 엄마는 예고 없는 침묵에 당황했고 균형 잃은 기대를 버거워했으며 그 돌연한 변화의 원인을 아이에게서 찾았다.
아이는 아빠의 등에 대고 몇 번이고 부르짖었다.
아빠, 아빠, 아빠….
아이의 엄마는 그제야 그 등에 대고 소리쳐야 하는 게 누구인지 깨달았다.
여보, 내 말 좀 들어 봐. 우리 얘기 좀 해.
건네야 하는 버거운 말도, 네 탓이라 쏟아지던 책망 어린 말도 사라진 후 중간에 덩그러니 버려진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이가 목을 그은 건 아빠가 말을 안 한 지 한 달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