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퇴근길에 발길 닿는 대로 가니 편의점이 나왔다. 근린공원에는 또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지난주에 본 애들인가, 매치시켜 보려 했지만 당장 어제 먹은 점심 메뉴도 떠오르지 않았다. 엉덩이가 끼지 않는 넉넉한 의자에 앉아 맥주를 깠다. 이번 아이들은 저번 아이들보다 덜 시끄러워 술맛이 안 났다.
맥주를 홀짝이며 보다 보니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아이 네 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이 내가 맥주 한 캔을 다 비울 동안 한마디도 안 하고 있었다. 옆에 앉은 세 명은 그걸 모를 리 없는데도 저들끼리 신나게 떠들었다.
맥주 캔을 하나 더 깔 때쯤 말이 없는 아이 입술은 댓 발 튀어나와 있었다. 100미터 밖에서도 입술이 보일 것 같았다.
일이 나겠는데, 생각하는데 양반은 못 되는지 아이가 벌떡 일어났다. 세 쌍의 시선, 아니 나까지 네 쌍의 시선이 아이의 얼굴로 꽂혔다.
“너네 진짜 너무한다. 어떻게 말 한 번을 안 시키냐?!”
빽 소리를 내지른 아이가 가방을 훌쩍 메더니 그 자리를 벗어났다. 넋이 나간 세 명 중 한 명이 그 아이 뒤를 쫓아갔다.
처음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냥 말을 하면 되잖아. 나 여기 있다고. 관심 좀 달라고. 곧 웃음이 사그라들었다.
나는 그 뒤꽁무니를 보다가 필사적으로 모래를 집어삼키던 아이를 생각했다. 맥주가 썼다.
놀이 치료실은 당분간 금지였다. 본래 계획대로 미술 치료와 필담을 병행하다가 검사를 통해 구체적인 치료 방안을 결정하기로 했다. 그럴 확률은 거의 없었지만 부디 약물 치료나 입원 치료가 아니기를 바랐다.
다섯 번째 보는 아이는 한결같은 자세와 한결같은 표정으로 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표정만으로는 경과가 어떤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일관적인 얼굴이었다.
나는 하얀 종이와 12색 색연필을 앞으로 밀어 주었다.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모습을 그려 볼래? 글씨로 써도 돼.”
잠깐 망설이던 아이는 색연필 케이스에서 검은색을 꺼내 이젠 익숙한 동그라미와 세모들을 그렸다.
큰 동그라미, 큰 세모로 이뤄진 두 명은 종이 양 끝에 서 있었고 정확히 가운데에 작은 동그라미, 작은 세모가 있었다. 큰 동그라미 둘은 똑같은 말풍선 크기로 똑같은 검은 덩어리 말을 나눴다. 작은 동그라미 위에는 말풍선이 없었다.
검은색 색연필이 케이스 안의 제자리를 찾아갔을 때 나는 작은 동그라미를 가리켰다.
“얘는 왜 말을 안 해?”
아이가 나를 보았다. 평소보다 눈을 많이 깜빡였다.
“이건 공평하지 않잖아.”
아이와 눈을 맞추고 말했다.
내 말은 아이에게 충격을 준 듯했다. 눈이 티가 날 정도로 흔들렸고 손가락 끝이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멋대로 테이블에서 튀어 올랐다. 색연필 케이스는 아이가 손을 뻗으면 바로 잡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검은색 색연필은 케이스 맨 오른쪽에 있어서 뚜껑을 열지 않아도 헐거운 틈으로 그냥 빼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이는 손을 뻗지 않았다. 충격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혼자 침묵하는 작은 동그라미를 하염없이 보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