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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혜경 Apr 02. 2023

필담(筆談)

7화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출근하자마자 사무실로 나를 부른 센터장이 30분 넘게 인생의 지혜에 대해 설파한 덕이었다. 요지는 지자체의 지원 범위가 축소되었다는 거였고, 결론은 그러니 그만큼만 일하라는 거였다. 센터장은 소명 의식이라는 말을 썼다. ‘소명 의식’은 첫 출근 때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은 센터장이 사랑하는 단어였다. 오늘의 소명 의식은 아픈 아이들은 발에 채도록 많이 있으니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는 의미로 설명되었다. 나는 난데없이 낯설고 껄끄러운 혀를 힘주어 눌렀으며 앞으로 맞잡은 양손의 엄지손톱을 주물렀다.


    알겠어요. 네, 그럼요.


    고분고분하게 대답하고 센터장실을 나와 복도를 걷는데 놀이 치료실의 통유리창으로 모래놀이 판이 보였다. 문득 모래의 맛이 궁금해졌다.     




    아이는 상담 시작 시각 정각에 복지사와 함께 왔다. 복지사는 왜인지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아이가 앉는 걸 물끄러미 보던 내가 이상한 기분에 고개를 들자 내게 눈을 찡긋하기도 했다. 첫 시간부터 그랬듯 복지사의 행동에 담긴 의미는 읽어 낼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읽어 낼 의지가 없었든지.


    아이는 빈 책상을 보고 눈알을 또록또록 굴렸다. 종이도 없었고 색연필도 없었다. 아직 아이를 보고 있던 복지사도 눈썹을 치켜떴다.


    “선생님.”


    나는 복지사에게 말을 건넸고 두 쌍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복지사는 고개를 덜그럭덜그럭 흔들더니 치료실 밖으로 나갔다.


    아이는 내가 맞은편에 앉을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치료실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치료실에서는 시계마저도 전자시계를 썼기 때문에 초침 소리 한 번 섞이지 않는 정적은 농밀했고 동시에 메말라 있었다. 처음엔 얌전히 자리를 지키던 아이는 시간이 지나자 자세를 몇 번이고 고쳐 앉았고 그때마다 쓱, 끼익, 하는 마찰음이 정적을 깼다.


    시간이 더 지나자 이번엔 손톱을 뜯는 소리가 들렸다. 탁, 탁. 나는 아이의 손톱이 맞닿았다가 어긋나는 걸 가만히 보고 있었다. 아이는 단 한 번도 손톱을 제대로 뜯지 못했다. 아이의 손은 테이블 위에 제일 잘 보이는 위치에 있었기에 나는 모든 과정을 알 수 있었다.


    아이의 시선은 바닥에 붙박여 있었다. 나는 우리가 함께 나눠지고 있는 이 침묵의 공평함과 시선의 불공평함에 대해 생각했다.


    나도 아이처럼 바닥을 보았다. 반질반질한 바닥엔 부스러기같이 생긴 모래알만 한 무늬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애초에 말끔한 바닥이 더 예쁜데 이런 무늬는 왜 넣는 걸까. 누가 뭘 흘려도 알 수 없게 생겼는데.


    의미 없는 생각을 하는데 으, 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아이가 나를 보고 있었다. 절박한 두 개의 눈알이 보였다. 아이가 입을 오물거렸다.


    으. 으.


    아이의 눈매 끝이 불그스름했다.


    으, 으.


    아이가 한 번 더 나를 불렀을 때 나는 테이블 서랍을 열었다. 미리 깔끔하게 깎아 둔 연필들이 줄지어 누워 있었다. 그중 제일 반듯하게 깎인 연필을 꺼냈다.


    고개를 들자 아이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아이를 마주 보았다. 나는 다시 공평에 대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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