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태경은 사랑이 재난처럼 들이닥친 순간을 기억한다.
봄이었다. 태경의 기억엔 그랬다. 2학년에 진학하면서 통합되어 운영되던 학급이 특기에 맞는 과로 나뉘던 3월. 첫 등교일. 봄이라기에는 바람이 찼다. 그날 아침 뉴스에 나온 기상캐스터는 꽃을 샘내는 추위라고 말했다. 꽃이 하나도 피지 않은 계절이었다. 은숙이 태경에게 목도리를 건넸다.
“아직 겨울이야.”
태경은 군말 없이 목도리를 받아들었다. 은숙, 그러니까 엄마가 등굣길에 뭔가를 챙겨준 건 그때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목도리를 매진 않았다. 태경은 이미 지난달부터 전기장판 코드를 꽂지 않아도 그럭저럭 잠들 수 있었다.
디자인과 교실, 그중에서 태경의 학급인 마지막 반은 본관 2층 끝자락에 동떨어져 있었다. 태경은 일찌감치 등교해 교실 맨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선은 부러 창밖에 두었다. 뺨을 스치는 바람이 얕게 부드러워질수록 교실은 소란해졌다. 태경은 교실 안을 돌아보는 대신 교문을 지나는 아이들의 정수리를 빤히 보았다. 대부분 목도리를 칭칭 감고 있었다. 저들끼리 들썩이는 아이들 틈으로 입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디자인과로 온 건 태경의 선택이었지만, 태경이 원한 일은 아니었다. 이 특성화고등학교의 세 학과 중 디자인과의 취업률이 가장 높다는 사실이 태경의 등을 떠밀었을 뿐이다. 어차피 어느 과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빨리 벗어나기만 하면 돼. 뭐든 배우기만 하면 상관없어. 버티는 건 자신 있어.
태경은 교실의 정물로 머무르고 싶었다. 창문턱이 허전해서 놓은 화분처럼. 거기 그런 게 있었나, 흐릿하게 떠올리고 마는.
그래서 그 애가 갑자기 옆자리 의자를 드르륵 빼고 앉았을 때, 태경은 소나기를 맞은 것처럼 놀랐다. 정작 그 애는 태연하게 턱을 괴고 있었다. 그 애가 턱 끝을 까닥였다.
“안 아파?”
톤이 높은 목소리. 동그랗고 말간 눈. 태경은 순간 그 애가 또래보다 어려보이는 데 어느 쪽의 비중이 더 큰가 가늠했고, 이내 당혹스러워졌다. 묻는 말이 지나치게 친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답지 않게 떠듬거렸다.
“어…… 뭐가?”
“여기. 피나는데.”
그 애가 태경의 손가락 끝을 톡톡 두드렸다. 체온이 스쳤다. 태경은 손을 주춤 뒤로 뺐다.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입안이 빈 서랍처럼 텅텅 비어 혀가 무안할 정도였다.
“…….”
태경의 시선이 손톱 끝으로 향했다. 그 애의 말은 맞지 않았다. 피는 이미 멈췄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치 채기도 어려울 정도의 피딱지만 적갈색 실선처럼 남아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피나는’ 것이 아니라, ‘피가 났던’ 것이다. 지금보다 한참 어릴 때 무심코 손톱을 뜯다가 은숙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은 이후 태경은 피가 나도록 손톱을 뜯고 나면 곧장 손을 씻었다. 태경은 피딱지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건 흡사 갈변된 핏줄처럼 보였다. 답을 기다리던 그 애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만.”
부스럭. 가방을 뒤지는 소리가 났다. 대일밴드나 연고를 꺼내려나, 태경은 생각했다. 그리고 1초 만에 손이 잡혔다. 놀란 태경이 고개를 돌리자 그 애의 책상 위에 놓인 꽃잎 모양 팔레트와 휴대용 브러시펜이 보였다. 투명한 브러시 몸통 안에서 물이 찰랑이고 있었다. 태경은 미간을 찡그렸다. 손에 닿는 체온이 낯설어 식은땀이 날 정도였는데 왠지 쳐낼 수가 없었다. 태경이 짐짓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뭐하는 거야?”
“이거 보여? 똑같이 해줄게.”
그 애가 불쑥 손등을 들이밀었다. 태경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뺐다. 그 애의 손톱 위에는 벚꽃이 있었다. 물감으로 그린 것이었다. 제법 그럴싸한 솜씨였다. 그 애는 태경이 손톱을 구경하는 틈에 태경의 손톱에 브러시를 이리저리 대가며 뭔가를 구상하고 있었다. 몰입할수록 통통한 입술이 비죽 밀려나왔다.
난 이런 거 싫어해, 말하려던 태경은 그 애의 손톱이 다시 보여 입을 다물었다. 자세히 보니 이쪽의 상태도 태경 못지않게 심각했다. 손톱이 페이스트리 반죽처럼 겹겹으로 뜯겨 그 결 사이마다 핏물이 굳어 있었다. 태경은 그 애를 힐끔 보았다. 그 애는 이제 브러시에 물감을 묻히고 있었다. 참 반죽도 좋은 애였다.
“어차피 신경 안 써. 아프지도 않고.”
태경이 그렇게 말하자 그 애가 고개를 처박은 채로 대꾸했다.
“알아. 이 정도면 이제 와서 아픈 게 이상하지.”
담담한 어조였다. 태경은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교실은 여전히 소란했다.
“그래도 상처잖아.”
그 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교실의 소란을 뚫고 또렷하게. 태경은 이상한 기분에 잠겼다. 아주 머쓱했다. 그리고 갑자기 교실 안의 누군가가 자신과 그 애를 주시하고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태경의 시선이 처음으로 교실 안을 향했다. 착각이었다. 아이들 중 누구도 둘을 보고 있지 않았다.
“물감이 다 떨어져서 흰색이랑 분홍색밖에 안 남았거든.”
그 애의 말투는 희한했다. 부쩍 친숙했고, 꾸미지 않은 태연함이 묻어나왔다. 마치 이전부터 오래 알아온 사람처럼. 태경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고, 그 애도 그걸 기대하지 않은 듯 곧장 말을 이었다.
“근데, 마침 잘됐다고 생각했어. 이제 봄이잖아.”
봄이잖아, 말의 맺음새가 산뜻하고 가벼웠다.
“흰색이랑 분홍색만 있으면 충분해. 이거 봐.”
그 애가 태경의 손가락을 모아 쥐더니 눈앞까지 끌어올렸다. 태경은 그제야 제 손톱에 만개한 벚꽃들을 보았다. 그 애의 말대로 벚꽃들은 흰색과 분홍색 물감으로만 그렸다고 보기 어려웠다. 어떤 잎은 희고, 어떤 잎은 옅은 분홍빛을 띠고, 어떤 잎은 색채가 짙어 언뜻 붉은 빛까지 돌았다. 태경은 어쩐지 심술궂게, 하나의 가지에서 난 벚꽃이 이렇게 다양한 색을 가질 수 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어찌됐든 그건 어떻게 보아도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었다. 삐죽삐죽 밉게 뜯겨나간 손톱 끝이 물감에 덮여 흡사 꽃잎의 귀퉁이처럼 보였다. 손을 책상 위에 얹고 묵묵히 손톱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 애가 웃는 기색이 느껴졌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최대한 오래 보자, 우리.”
그 애는 고개를 숙이고 손톱을 향해 속삭였다. 짐짓 장난스러운 어조였다. 태경은 고개를 들어 그 애를 보았다. 정확히는, 눈가에 속눈썹 결을 따라 드리워진 그늘을 보았다. 내리깐 눈에 퍽 애틋한 빛이 돌았다. 그 순간 태경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오래 보자는 그 말이 사실 자신을 향해 건넨 말이며 꽤 순도 깊은 진심이 섞여 있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그 애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 애는 다소 쑥스러운 듯 볼을 살짝 붉히더니, 곧 웃었다.
태경은 그제야 그 애에게서 풍기는 냄새를 맡았다. 소설 속에서 묘사하듯 마냥 향기롭지는 않았다. 낭만적일 것도 없었다. 미세한 기름 냄새였다. 찬 바람내가 섞였지만 왠지 포근했다. 태경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애가 남의 손을 잡을 때 새끼손가락을 드는 습관이 있는 걸 알았고, 웃을 때 오른쪽 눈이 왼쪽 눈에 비해 미묘하게 조금 더 느리게 감긴다는 것까지 알아채고 말았다. 태경의 시선이 그 애의 명찰에 가닿았다. 이성주. 이름을 수놓은 씨실과 날실까지 헤칠 것처럼 뜯어보던 태경은 문득 목이 잠기는 걸 느꼈다. 세 글자. 고작 세 글자. 불안한 예감이 혀끝을 적셨다. 열여덟 살 봄, 태경은 계절에도 맛이 있음을 배웠다. 봄이 썼다. 봄은 그럼에도 봄이었다. 어쩔 도리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