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난 사실 태경이 너 이미 알고 있었는데. 우리 1학년 때 같이 현장학습 나갔었잖아. 우리 담임쌤 못 오셔서 너희 반이랑 우리 반 같이. 기억 안 나? 진짜? 네가 그때 나한테 먼저 말 걸었었는데. 열쇠고리 너가 직접 만든 거지? 진짜 잘 만들었네. 이렇게. 아니, 진짜야! 내가 놀라가지고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봤었어.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기억 안 나? 와, 이걸 어떻게 까먹지? 태경이 네가 분명히 그랬어.
손톱에 물감 묻었잖아. 근데 그것도 그림 같다. 예뻐.
그 애, 성주는 자주 조잘거렸고, 자주 서운해했고, 자주 투정부렸고, 자주 웃었다. 태경의 손톱에 핀 벚꽃이 채 다 지기도 전이었다. 성주는 웃을 때 눈을 초승달처럼 접었다. 태경은 그럴 때마다 하던 행동을 멈추곤 했다. 그 휘어진 눈매 틈에 끼어버린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문제는 명확했다. 둘이 동급생이라는 것. 여자들만 다니는, 여자특성화고등학교의. 그게 문제였다. 그건 재난이었다. 그때의 태경에겐. 그리고 지금도 종종.
“일찍 일어났네.”
태경은 말간 목소리에 눈을 떴다. 성주가 커피 잔을 들고 침실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멍하니 눈을 끔벅이던 태경이 부스스 상체를 일으켰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쓰던 태경은 성주가 신은 수면양말에 시선이 닿고 나서야 잠깐 잠든 찰나에 고등학교 때 꿈을 꿨다는 걸 알았다. 머리를 쓸어올리는 태경의 잇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고해성사 같은 한숨이었다.
“못 잤어.”
“또?”
성주가 몸을 바로 세웠다. 생글생글 생기가 흐르던 얼굴이 금세 걱정으로 물들었다. 태경은 마른세수를 했다. 손바닥에 닿는 얼굴이 까칠했다. 벌써 며칠째 잠을 설치고 있었다. 일주일 전 이사하고 난 뒤부터였다. 성주는 집터가 잘못된 거라는 둥 머리를 북향으로 놓고 자서 그렇다는 둥 유난이었다. 태경은 미신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사흘쯤 연달아 조각잠을 자고 나니 무슨 신이든 빌어서 해결만 된다면 기꺼이 무릎을 꿇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태경아. 그러지 말고 수면치료 같은 거 한번 받아볼래?”
성주가 침대 귀퉁이에 걸터앉아 태경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다정한 손길이었다. 침대 헤드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태경이 눈썹을 비스듬히 세웠다.
“수면치료?”
“아니, 내가 얼마 전에 애들 만나러 갔었잖아. 근데 거기서 상담치료 얘기가 나왔거든. 생각보다 많이 받고 있더라구. 우리 애들이 그래 보이진 않았는데…… 아무튼 난 그런 치료 종류가 그렇게 많은지도 처음 알았어. 민영이 알지? 민영이는 최근에 최면치료를 받았대.”
성주의 말이 급작스럽게 빨라졌다. 태경은 힘없이 웃었다. 또 시작이다. 성주는 부지런히 떠들면서도 손가락으로 태경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매만졌다. 태경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최면치료. 걔가 자기도 몰랐는데. 어릴 때 그런 일 때문에. 너무 신기하지. 우리 다 난리 나서 거기 연락처 달라고. 태경아, 듣고 있어? 아이처럼 들뜬 성주의 목소리가 손상된 카세트테이프 음악처럼 뚝뚝 끊어졌다. 귓가가 간지러웠다. 아니, 아닌가. 태경은 가만히 손을 들어 가슴을 문질렀다. 아이, 듣고 있냐고. 밉지 않게 채근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눈을 감고 어둠 속에서 귓가가 간지러운지 가슴께가 간지러운지 어림하는 느낌.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까치발을 들고 선반 위를 더듬거리던 어릴 때처럼 설레고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