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항상 이랬다. 태경은 5층 빌딩 앞에서 잠깐 숨을 골랐다. 성주의 얘기를 듣다 보면 어느새 휘말려 그 뜻대로 움직이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성주는 기어이 출근 전 태경에게 명함을 쥐어주고 갔다. 친구를 닦달해서 받아냈다는 명함이었다. 오늘은 일 없지? 꼭 가야 해. 당부하던 눈이 단호했다. 이 종이쪼가리 한 장이 연인을 불면의 늪에서 건져내주리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는 눈이었다. 태경은 명함을 한 번 더 들여다보았다. 임연재 최면심리연구소. 성주는 믿음으로 걸음을 떼는 사람이라면 태경은 불신으로 숨을 고르기 위해 멈춰서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지는 건 태경 쪽이었다. 그럴 때마다 태경은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우화를 떠올렸다.
최면심리연구소는 빌딩 맨 꼭대기에 있었다. 예약시간에 맞춰 도착하자 소장이 웃는 얼굴로 맞아주었다. 그녀가 내민 명함에 ‘임연재’라는 이름이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다. 태경은 연재를 보며 은숙을 떠올렸다. 닮은 구석이 전혀 없는데도.
태경과 연재는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작정 ‘눈을 감으세요. 레드썬! 뭐가 보이나요?’ 이런 식은 아니라고 했다. 연재는 태경이 작성한 사전 질문지를 보더니 여러 가지를 물었다.
“원래도 잠을 못 자는 편이었어요?”
“아뇨. 자기로 마음먹고 누우면 금방 잠드는 편이에요.”
“여기 직업란에 프리랜서라고 쓰셨는데, 실례지만 어떤 일 하세요?”
“일러스트레이터예요.”
“하시는 일은 안정된 편인가요?”
“네. 수입도 일정하게 들어오고요.”
연재는 대답을 들을 때마다 눈을 두어 번 빠르게 깜빡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질문지를 매만지다가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최근에 이사를 하셨네요.”
“네.”
연재가 그 부분에 크게 동그라미를 쳤다. 이게 문제일 수도 있겠어요. 태경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정확히 어떤 부분이 문제라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연재는 질문지를 내려놓고 눈을 마주쳐왔다.
“보통 본인도 모르는 트라우마가 현재에도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많아요. 본인도 모른다는 건 그 기억이 잠재의식에 있기 때문이거든요. 최면은 그 기억을 의식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이에요.”
방송에 나오는 것처럼 쉬운 일은 아니라는 말이 뒤따랐다. 태경은 간간이 음, 네, 추임새를 뱉으며 고개를 끄덕이다 구석에 있는 어항을 보았다. 구피 네댓 마리가 헤엄치고 있었다. 모두 활발했다. 어느새 연재가 설명하는 목소리는 아득히 멀어지고, 태경은 구피에 집중하고 있었다. 구피들이 어항 안을 휘휘 쏘다녔다. 태경은 그걸 멍한 눈으로 좇았다. 그리고 금세 피곤해졌다. 아무런 목적도 방향성도 없는 움직임이었다. 구피들의 몸짓은 헤엄치기 위한 헤엄 같았다. 어쩐지 불쾌하기까지 했다. 태경은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다음 이 시간에도 방문 가능하세요?”
불쑥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태경이 눈을 똑바로 떴다. 연재가 태경을 보고 있었다. 태경은 부끄러워서 허겁지겁 대답했다.
“네, 네.”
“호흡법을 미리 연습해오시면 좋아요. 최면에 안 드는 경우도 꽤 있거든요.”
연재가 종이를 내밀었다. 최면치료 훈련법. 호흡 조절하기. 촌스러운 글씨체가 눈에 띄었다.
“하루에 세 번, 특히 자기 전에는 꼭 하세요.”
종이가 바스락 거렸다. 호흡, 글자가 손가락 사이에서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