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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리나 작가 Feb 09. 2023

지금까지, CJ루나였습니다

20대, 그리운 부캐

띠띠띠 띵!

디지털시계소리가 11시를 알리면, 국장오빠의 큐 싸인이 들어오면서 On air가 켜진다.



안녕하세요, Cj루나입니다.
첫 곡은 이적이 부릅니다. '아무도'



2000년 초반에 인터넷 방송국 시대가 열렸다.

난 CJ루나이다.

CJ루나는 과거 직업(?)상 사용했던 닉네임이다.

다시 말해 나는 온라인에 존재하는 모 음악방송국의 메인 시간대인 밤 11시 코너를 진행한 DJ였다.

어쩌다가 CJ가 되었느냐고 물으신다면, 잠시 시간을 거슬러 가보겠다.




바야흐로 내 나이 스물다섯 초여름, 여느 월요일.

몇 안 되는 사원에게 늘 '가족 같은 우리 직원'이라 부르던 배가 남산만한 사장님이 오전 회의 때, 어떤 한 인물을 염두한 정리해고선포하셨다.


"흠, 좀 어려운 이야기인데 IMF로 지금 다 힘든 건 알 거야. 그래서 우리 회사도 불가피하게 인원 감축을 결정했어요."


가늘고 예리한 그의 눈이 오늘따라 더 길쭉하고 삐뚤삐뚤해 보이기 시작하면서 사장님의 입에 정리해고라는 단어가 오르자, 그가 마치 백설공주에게 독사과를 내민 마귀할멈 같아 보였다.


'망할 놈에 가족 운운할 때는 언제고. 가족이라며! 말이나 말던가.'


사장님의 수족처럼 비서 업무까지 전담하고 있던 나는 B대리님이 정리해고 대상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해고 대상으로 사전당첨되신 B대리님이 곧 결혼할 예정이라는 소식도 접했던 나였기에 가슴에 커다란 돌덩어리를 하나를 쿵 하고 얹어놓은 기분이었다. 내가 해고를 시키는 것도 아닌데 괜스레 불편했다.


내 인생 첫 회사의 보스께서는 내게 비서업무를 비롯해, 기업임원대상 제품교육, 미국/스위스 본사와의 무역업무,  홍콩지사 매니저 업무 등 나 조차도 미처 몰랐던 내 안에 숨어있던 모든 잠재력을 박박 긁어내서 일을 시켰다.  

9시 출근에 6시 퇴근이라고 근로계약서에 분명 명시되었던 같은데, 난 분명 봤는데! 현실은 7시 하고도 분침이 한 바퀴 돌아야 퇴근이 가능했다.

그렇게 일하고는 매월 말 세금 공제 후 98만 8천8백2십 원을 입금받은 지 어언 2년째.

과도한 업무와 박한 열정페이, 매일 사장님이 침 튀기며 는 짜증을 주워들으며 제시간에 퇴근하지 못하는 이 생활에 슬슬 넌더리가 나던 참이었다.


사장님이 그 대상을 발표하기 직전, '누군가의 위기를 나의 기회로 삼자!'라고 내 안에서 소리쳤다.

그리하여 땅굴도 팔 수 있는 혈기에, 시답지 않은 연애나 하고 있던 내가 대리님을 대신하여 시원하게 잘리는 자리를 선점하기 마음먹었다.  


"그냥 제가 그만두겠습니다."



'설마, 이 넓은 세상에 날 필요로 하는 또 다른 회사가 없겠어?'라며 기세 당당하게 천장을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

5초간 적막이 사무실을 가득 채웠고, 눈이 땡그래진 사장님을 비롯한 차장님, 두 분의 대리님, 경리사원 등 모두가 깜짝 놀라 일시정지모드가 되었다.

PAUSE.

비장한 표정으로 그만두겠노라 다시 언급했다.


사장님: 그만둔다고? 리나 씨가? 왜?


나: 누군가 한 명 그만둬야 한다고 하시니 제가 그만두겠습니다.  


사장님은 한동안 멍하니 날 바라보셨다.  

한 번 내린 결단을 가족 같은 직원이 한 명씩 돌아가며 말렸으나 결국 아무도 내 결정을 돌릴 수 없었다.

월말이 되어 조촐한 회식 겸 송별회 끝에 사장님은 눈시울을 붉히시며 "꼭 이렇게까지 해야..."라고 말씀하시다가 나의 단호한 눈빛에 말을 꿀꺽 삼키셨다.

그날로 첫 회사생활을 그 어떤 후회와 미련도 없이 장렬하게 마무리했다.

 


 

외국계 회사의 채용공고를 노리며 토익점수를 따기 위해 곧바로 독학에 돌입했다.

음악을 사랑하는 나는 매일 밤 음악을 들으며 공부했다.

아이러브스쿨, 버디버디, 싸이월드 같은 커뮤니티 사이트가 생겨서 너도나도 가입하고 소통할 당시였다.

그러다 CJ라는 말이 인터넷에 둥둥 떠다녔다.



'CJ? 이건 뭐지?'



CJ는 Cyber Jockey(인터넷상 디제이)의 줄임말이었다.

난 CJ에 대해 알아보았고, 개인방송국과 인터넷 방송국이 존재하는 새로운 세계를 접했다.

지금 시대로 치자면,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 음악을 틀어주는 건데 그 당시에는 캠카메라가 연결되기 직전이라 마이크를 통해 목소리만 전달되는 방식이다. (이러니까 내가 꽤 나이를 먹은 것 같은데 고작 45살이다)


다채로운 음악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니 나 같은 뮤직마니아에게 이 얼마나 안락하고 편리한 시스템이란 말인가.

원하는 토익 점수를 4개월 만에 딴 후, 호기심이 생겨서 거침없이 개인 CJ에 도전했다.

채널과 이름을 만들고, 개인방송국을 개설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멘트도 술술 튀어나왔고, 올드팝부터 재즈, 가요 등 내가 알고 있는 얕지만 지대한 장르에 걸친 음악 이야기와 추천음악을 청취자에게 소개해드리며 감성을 나누니 이 또한 묘미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감대가 넓혀지고, 채팅창에 고민이나 사연을 털어놓으시는 분, 하루 걸러 하루 내 음악을 듣기 위해 찾아주시는 분이 늘어나면서 즐거움과 보람, 그리고 책임감이 커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규모가 있는 음악방송국인 하늘방송국, 뮤즈캐스트 등 몇몇 방송국에서 띄운 모집 공고 배너가 눈에 들어왔다.


OO방송국에서 함께 하실 CJ를 모집합니다.


가족이나 식구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은 , 아주 마음에 쏙 들었다.





- 2탄으로 coming soon





#별별챌린지 #글로성장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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