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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리나 Feb 25. 2023

5개월 만에 다시 하는 이사, 내겐 OOO이다

그 힘든 '이사'를 대하는 자세

"지금 이 사람, 몇 프로 정도 남았나요?"

글쎄요... 한 2%?


내 에너지 잔량이다.

죽도록 원고 퇴고에 몰입했다.

어차피 나중에 보면 신기하게 고칠 게 또 눈에 띄겠지만.

4년 만에, 아니 완전 꼴딱 밤을 새웠으니 정확히 따져보자면 서른 살 때, 홍대 클럽에서 미친 듯이 음악에 몸을 맡기 밤 새운 이후로 하얗게 밤을 지새웠다.


3차 퇴고를 마치고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하고 23분.

자려고 누웠는데 낮 내내 카페인을 몸 안에 들이부었더니 잠이 오지 않는다.

카페인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물음표 두 개가 둥실 떠올랐다.


"너 최선을 다 한 거야? 후회하지 않겠어?"

후회.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자며 매 순간 노력하며 살아온 나.

정말 후회하지 않을까?

몸은 누워있는데 정신은 1시간 20분을 넘게 깨어 있다.

도저히 안 되겠다.

결국 일어나서 노트북을 켰고, 다음 날 한 번 더 봐야지 했던 원고를 클릭했다.

그리곤 아침 7시가 되서야,깊은숨을 내쉬며 퇴고를 끝마쳤다.


몸은 천근만근, 에너지 고갈.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퀭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는다.


최선을 다 했어, 이제 진짜 후회가 없다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여야지


어제 오후 6시, 원고를 편집장님께 보내드렸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후회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걸 다 쏟아부었다.




다음 날인 오늘 아침, 나는 이사를 한다.

포장 이사를 맡겼지만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떠올리면 저절로 '피로 군단'이 우르르 몰려온다.

집이 깨끗하진 않더라도, 정돈되지 않으면 속이 시끌시끌 거리고 일에 집중을 못 하는 이 놈에 성격.

닮지 않아도 되는 걸, 아니 안 닮았으면 좋았을 걸 엄마로부터 배워버렸다.

그래서 매번 이사를 갈 때마다 최대한 3~4일 안에 집 정리를 끝내는 편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24시간은 똑같은데 이러려면 얼마나 몸을 혹사해야 하는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내가 봐도 더러운 성격이다.


다행히 삼일절이라는 빨간 날이 중간에 살짝 껴 있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며 달력을 뚫어져라 보며 결심한다.

그래, 삼일절까지 끝내보자!


올해 아홉 살이 된 아들을 보며 '일손이 하나 더 늘었구나' 싶은 나.

어젯밤 "너도 이제 엄마아빠를 도와서 짐 정리를 해야 해."라며 아들에게 미리 말해놓았다.  


이사는 환경적 변화이다.

여러 환경의 변화가 있겠지만, 나는 이번 이사를 일종의 '긍정적인 트리거(Trigger)'로 삼기로 마음속에 땅땅 못 박았다.

인간의 심리, 생활 습관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는 '환경적 변화'가 빠른 시일 내에 큰 효과를 거두는 1순위로 꼽힌다.

오죽하면 '맹모삼천지교'라는 구전이 전해지겠는가.

이사를 가서 좋은 점을 하나하나 따져본다.


1. 우선 화장실이 두 개 있다.

완전 마음에 든다.  

우리 집에는 화장실이라는 공간을 사랑하는, 그 안에서 한참을 살다오는 두 명의 남자가 있다.

한 명은 샤워를 하루 종일하고, 다른 한 명은 볼 일을 평균 삼십 분 동안 보다가 나온다.

어느 순간부터 볼 일 보러 들어갈 때 휴대폰을 놔두고 가게 만들었다. (그다지 효과가 크진 않지만 그래도 약 5분 정도 짧아진 거 같아 위안이 되었다)

그들에게  고상하게 '서로에 대한 배려'를 논하다가 두 달이 지날 즈음, "그만 좀 나오라고!"라며 고함을 치는 나를 보았다.

이제 화장실이 급해지면 오랑우탄처럼 변하는 내 모습과도 안녕이다.

화장실도 각자 쓸 수 있어. 아싸!



2. 귀염둥이 아들의 학교가 더 가깝다.

학교까지 가는 길을 몇 군데 찾아보고 겁이 다소 많은 아들이 혼자 다닐 만한 길을 뚫어놔야겠다.


3. 집 근처에 넓은 놀이터가 있다.

산책하고 아침 조깅하다가 거기 앉아서 사색 또는 멍 때릴 나를 상상만 해도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4. 그 놀이터 옆에 평소 내가 애정하던 플레이스, 북 카페가 있다.

2층으로 된 구조인데 위층에서 주로 글을 썼다. 책도 많아서 좋지만 이 카페는 카페가 만들어놓은 고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다른 곳보다 일을 하거나 혼자 발걸음 하시는 분이 오셔서 대체로 조용하다.

난 이곳에서 종종 글을 쓰곤 한다. 그 카페가 이전 집보다 가까워졌다!  기쁨에 콧노래가 나온다.



이런 생각을 사랑하는 그 카페에 들어와 앉아 글로써 정리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올해 두 권의 책을 더 집필한다.

한 권은 이미 계약을 마쳤고, 다른 한 권은 공저를 꺼리는 내가 어느 작가님께 처음으로 공저를 제안했다.

그녀와 내게 공통점이 많았다. 난 그런 그녀가 인간적으로 좋다.

그녀의 책을 읽고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미약하게나마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둘이 함께 책을 쓰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내게 도움을 청한 적도 없는 그 작가님에게 이런 생각을 먼저 갖는다는 게 죄송스러워 조심스레 제안했는데, 감사히도 흔쾌히 긍정의 답을 주셔서 우린 곧 작업에 들어간다.



나라는 사람은 '책을 몇 권 냈느냐'가 중요치 않다.

어떤 목적, 어느 정도의 고민과 질을 풀어놓은 책인가, 어떠한 과정을 거쳤느냐가 더 중요하다.

한 권을 쓰더라도 제대로 된 책을 쓰고 싶다. 

한 권 한 권에 열과 성, 마음과 혼(魂)을 갈아 넣어 세상에 나와야 하는 책, 읽히는 책, 가치 있는 책을 내고 싶다.


지금 이사 온 집과 주변 환경, 그 모든 것이 우리 가족과 나라는 사람, 내가 쓸 원고에 더 좋은 자양분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이사 온 지 5개월이 채 안 되어 또 하게 된 이 이사가 '이유 있는 이사'라고 느낀다.

그래서 피로도가 이미 100%를 훌쩍 넘은 시점에 '이번 이사는 나에게 '트리거(trigger)'임이 틀림없어!'라고 규정지은 것이다.


그리고 이 와중에,

정신도 몽롱하고 체력이 완전히 바닥 나 있는 형편없는 상태에서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바쁜 이삿날 아침 카페에 와서 이 글을 적고 있는 이유는,

글을 쓰는 여러 작가님에게 이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어서 이다.


세상에 완벽한 글은 없다, 하나 그때그때의 나를 담은 나만의 글은 존재한다




우리는 언제나 글을 잘 쓸 수 있는 상태에만 놓여있지 않다. 

그럼에도 글을 그냥 써 보았으면 한다.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나를 돌아보기 위해,

추억을 고이 간직하기 위해,

더 나은 나와 사랑하는 이를 위해,

그리고 밝은 미래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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