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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Lucy Mar 29. 2024

늦었지만, 장국영을 사랑합니다.

영화 패왕별희를 본 늦덕의 뻐렁치는 마음..

현시대에도 아름다운 연기, 노래 등을 보여주는 아티스트야 넘쳐나지만 어쩐지 아쉬워질 때가 있다. 비틀즈, 마이클 잭슨처럼 한 시대를 풍미한 아티스트들의 모습을 보다 보면 그들의 호시절을 함께 하지 못했다는 것에 미련이 생긴다. 특히 이런 마음은 영화계에서 두드러지게 느껴진다. 매트릭스, 스타워즈, 쥬라기공원을 개봉 당시에 봤을 때의 흥분감은 듄, 아바타 등의 영화를 보고 난 후 봤을 때와는 천지 차이겠지. 기술력도 기술력이지만 배우들의 연기에 집중하게 하는, 다소 투박하지만 서정적인 스토리를 담은 예전 영화들은 겪어보지 못한 시절에 대한 향수까지 느끼게 한다.


동시대를 살지 못해 가장 아쉬워하는 인물이 있다면 바로 장국영이다. 어렸을 때부터 아빠가 홍콩영화를 보는 걸 지켜봐 왔지만 사실 나는 홍콩영화에 별 관심이 없었다. 무간도처럼 유명한 영화야 오고 가며 보았지만 왜 유명한지 직관적으로 알긴 어려웠고, 장국영이 출연한 다수의 홍콩영화도 그랬다. 아비정전은 작심하고 본 적은 있다만 양조위의 로맨스가 더 기억에 남았고, 천녀유혼은 클립만 보고 참 아름다운 얼굴이라 생각했다. 그의 연기에 관한 생각보다는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그의 눈망울이 유난히 기억에 남았을 뿐이다.


그러다 최근 장국영의 대표작들을 재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고 '패왕별희'를 예매했다. 패왕별희를 고른 이유는 포스터가 아름답고, 그 안에 장국영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보고 나면 한동안 현생을 살기 힘든 '피폐물'의 대표주자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선택한 부분도 있었다. 해피엔딩도 좋지만 새드엔딩이 주는 습기 가득한 여운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안 볼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세 시간 동안 장국영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치밀하게 계산된 것인지 자신도 모르게 녹아든 것인지 모르겠지만 산뜻 산뜻하게 움직이는 손 끝과 그 끝을 주시하는 우수에 찬 시선, "고마워요, 주샨"이라는 짧은 문장에 담긴 슬픔과 분노, 다스리려 애썼지만 서툴게 비집고 나와버린 어린아이의 여물지 못한 감정들, 시대의 격동으로 인해 관객이 바뀔 때마다 그들과 세상에 적응하려 분투하는 유약한 인간의 모습까지. 누군가의 연기에 이렇게 흠뻑 젖어 영화를 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포스터가 너무 아름답다 흑흑.


패왕별희는 홍콩작가의 소설이 원작이나, 중국인 감독과 중국 자본에 의해 만들어져 홍콩 영화라고 볼 순 없다. 하지만 장국영이 존재함으로써 홍콩 영화의 비애적 느낌이 두드러진다. 나는 각 나라에서 만든 영화를 볼 때 은근히 느껴지는 뉘앙스 같은 것이 있다 생각하는데,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로맨스 영화의 경우, 프랑스 영화는 비주얼만 보면 서정적인 것 같지만 다소 괴랄한 부분이 있다. 미국 영화는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처럼 말끔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량식품 맛이 난다. 홍콩 영화는 분명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구슬프고 아련하기 짝이 없다. 사랑의 복잡한 측면 중 애수만 아름답게 엮어 눈물로 빚어낸 것 같다. 톤 자체가 이러니, 장국영의 존재는 더욱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어른어른한 눈망울로 차마 말하지 못한 사랑을 표현할 때 그의 모습은 상대방을 절로 원망하게 만든다. 저렇게 애타게 사랑한다고 하잖아, 왜 듣질 못하니.. 엉엉.


만일 장국영이 현존하던 시절에 그의 영화를 봤다면 아마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겠지. 어떤 사람은 별 힘도 들이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을 뺏는데 능통한데, 그는 나에게 그런 사람이었을 것 같은 직감이 든다. 비록 그의 마지막은 비통하고 황망했지만 그를 사랑한 시절만큼은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실제로 그가 떠난 이후 팬들 중 그를 따라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많다던데 어쩌면 그때 그를 사랑하지 못한 게 다행이려나. 이제 곧 그의 사망 21주기가 다가온다. 다른 영화들도 한번 봐야겠다.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영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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