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채식 맛있어서 하잖아.
채식하겠다고 마음먹는 순간은 모두 열정이 넘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당황하게 된다. 식단 중 육류, 유제품 등이 든 음식들을 모두 제외해야 하는데, 생각보다 이 범위가 엄청나게 넓기 때문이다. 이전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과자, 빵, 라떼 등 간식은 물론이거니와 양념장에 들어가는 육가공 재료들도 무시하지 못한다. 나는 엄마가 만들어주는 반찬들을 저항 없이 수용하기 때문에 참치액, 새우젓 등의 기본양념은 비건으로 바꾸지 못했지만 요리의 주재료가 채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나마 비건을 향한 길이 수월한 편이다. 그래서 오늘은 집에서 주로 먹는 메뉴들을 소개해 보기로! 이름하야 '야, 너두 채식할 수 있는 메뉴'.
본격적인 메뉴들을 소개하기 전에 채식할 때 유용한 재료들을 짚고 넘어가 볼까 한다. 우리는 채소류가 주는 맛을 평가절하하기 쉬운데, 자세히 느껴보고 점차 익숙해지다 보면 이 친구들이 주는 독특한 맛을 대체할 재료를 찾기 쉽지 않다. 아무리 가공을 한대도 날 것 그대로의 맛은 따라잡지 못한다는 걸 채소를 먹으며 재차 실감한다.
첫 번째 재료는 오이. 오이 헤이터들은 공감하지 못하시겠지만 오이의 상쾌함은 민트로도 따라잡지 못한다. 오이를 탕탕 두들겨 부순 후, 식초와 소금 등으로 간을 하면 여름을 뚝딱 날 수 있는 오이무침 완성이요. 냉수를 들이켜지 않아도 몸 안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소해 준다. 두 번째 재료는 파프리카. 파프리카를 생야채로 먹으면 웬만한 과일이나 사탕보다도 더 달다. 가공식품과는 달리 혀에 들쩍지근하게 달라붙는 찝찝한 단맛이 아니에요. 썰어 씨만 털어내면 간단한 간식이 된다. 세 번째 재료는 옥수수. 단맛 성애자답게 옥수수의 단맛도 놓칠 수 없다고요. 그냥 쪄먹어도 맛있지만 샐러드에 넣으면 톡톡 식감도 살리고 짠맛 위주인 드레싱에 훌륭한 킥이 되어준다. 마지막은 버섯! 채식주의자 중에는 육류를 대체하기 위해 버섯의 식감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버섯은 그 자체로도 향이 멋지고(오타가 아니다. 어떤 버섯들은 향이 고풍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다.) 활용도도 높다. 최근엔 비건 굴 소스가 나와 구매해 봤는데, 표고버섯을 활용해 만든 소스로 일반 굴 소스보다 풍미가 훨씬 좋더라.
자, 그럼 이들을 활용해서 자주 먹는 채식 메뉴를 소개해 볼까.
1. 구절판 or 월남쌈
처음부터 난이도가 너무 높은가요. 구절판과 월남쌈을 하나의 항목으로 묶은 이유는 둘 다 조리 과정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손질한 야채를 쌈무에 싸 먹느냐 라이스페이퍼에 싸 먹느냐 하는 문제일 뿐. 준비하는 과정에서 손질할 재료들이 많아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시겠지만 달걀지단과 육류 등을 제외하게 된다면 남는 건 채소를 채 써는 일뿐이다. 이 정도는 우리 할 수 있잖아요. 재료도 꼭 거창하게 많이 준비할 필요 없다. 본인이 좋아하는 채소 위주로 준비하면 된다. 나의 경우 필수적인 재료는 오이, 당근(원래 잘 안 먹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섞어 먹어야 한다), 양배추, 파프리카, 볶은 버섯 정도. 쌈무나 라이스페이퍼는 마트에서 판매하는 걸 사 오고 찍어 먹을 소스는 취향에 따라 고르면 된다. 나는 간이 심심한 게 좋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먹는 편. 속이 든든하고 편안해지며, 한번 준비해 놓으면 며칠 동안 반찬 걱정 없이 먹을 수 있어 좋다.
2. 포케
처음 '이대로만 먹으면 채식도 가능하겠다!'라는 생각을 들게 한 음식은 포케였다. 포케는 하와이의 어부들이 생선 자투리를 잘라 밥 위에 간장과 함께 올려 먹었던 음식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탄생할 당시 원형은 간단했지만 지금은 새우나 고기류, 해초, 야채, 과일 등을 올려 세상 화려한 모습을 자랑한다. 사 먹을 당시에는 주로 연어를 메인 토핑으로 지정하고, 현미밥으로 먹었는데 간단하게 간장 소스로만 비벼도 맛이 풍성해 포케만으로 세끼를 때운 적도 있다. 집에서 만들어 먹을 때는 메인 토핑을 제외하고 오이, 옥수수, 파프리카 등을 추가해서 먹고 있으며 뭔가 허전할 때만! 냉동 새우를 데쳐 넣거나 맛살을 넣기도 한다.
3. 당근 라페
재료가 채소류라면 빠질 수 없는 메뉴가 샐러드다. 그중 최근 주목을 받는 게 바로 당근 라페인데, 조리법이 간단하고 여기저기 곁들여 먹기 좋다. 당근을 채 썬 후, 설탕, 머스터드, 레몬즙을 넣고 하루 숙성해 먹으면 된다. 나는 호밀빵(아직 버터가 안 들어간 완전 비건 빵을 사진 못했다..)에 샌드위치를 해 먹거나 샐러드 위에 올려 먹는데, 당근 헤이터인 나도 잘 먹을 정도로 맛있고 무엇보다 식감이 참 좋다. 참고로 머스터드는 홀그레인 머스터드를 넣고 설탕보단 꿀을 넣는 게 좀 더 맛있다.
4. 채소구이, 볶음과 나물
이제까지 언급한 메뉴들이 다 생야채라 "난 생야채는 몸이 안 받아!" 하며 투정하신 분들이라면 주목. 채소는 있는 그대로 먹는 게 영양소 손실을 줄이는 방법이라지만 사람에 따라 생채소를 소화하기 힘든 체질도 있다. 이럴 땐 굽고 볶고 지지는 게 답이다. 구워서 더 맛있는 채소는 감자, 고구마 등의 구황작물이다. 수미감자를 올리브유에 살포시 눕히고 소금을 톡톡 쳐 구운 후에 드셔보신 적이 있나요? 정말 달고 맛있다. 올리브유 중엔 트러플향이 가미된 올리브유가 있는데, 이걸로 감자를 구우면 정말 맛있으니 시도해 보시길. 볶아서 더 맛있는 채소는 버섯, 오이, 애호박 등이다. 특히 오이는 매번 생으로 먹다가 한번 물기를 쭉 빼고 불에 달달 볶은 후 소금과 들기름을 뿌려 먹었는데 충격적으로 맛있었다. 나물 역시 좋은 재료다. 취나물을 데쳐서 들깨와 함께 버무리거나 깻잎을 쪄서 매콤하게 조려도 밥 한 끼는 뚝딱이다. 부모님과 함께 거주하지 않거나 손재주가 없는 사람들이라면 첫 시도가 서툴겠지만 하다 보면 는답니다, 정말로요.
생각해 보면 우리가 희구하는 맛은 대부분 채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단맛은 옥수수나 파프리카에서, 매운맛은 고추에서, 기름진 맛은 잣이나 땅콩 등의 견과류에서. 채소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맛이라면 굳이 다른 생명체나 자연의 희생을 담보하면서까지 찾을 이유는 없겠지. 아직 백 퍼센트의 비건은 아니더라도 비율을 높여가다 보면 언젠가 채소와 과일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오래 갈 수 있는 식단을 완성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혹시 이 시리즈를 보시는 분 중 '나도 채식 한번 해볼까?' 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먹짱의 자존심을 걸고 정말 맛있어서 추천하는 거니 일단 한번 도전해 보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