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만한 사람들도 절로 초조하게 만드는 사랑이란..
기상 시간 8시. 다시 되찾은 나만의 리듬 핫챠.
OTT서비스 중 유일하게 구독하고 있던 넷플릭스마저 해지해버렸던 건 볼만한 콘텐츠가 없어도 너무 없었기 때문이다. 초기엔 오래된 영화들도 곧잘 올려줘서 흥미는 있었지만 볼 기회가 없었던 영화도 볼 수 있었는데, 오징어게임 성공 이후 콘텐츠가 다 징그럽거나 잔인하거나 욕을 하는 등 자극적인 게 판을 쳐서 나 같은 사람은 볼만한 게 전혀 없었다. 그나마 최근에 봤던 게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이니 취향이 뭔지는 다들 짐작하실 수 있겠지. 그러다 최근 다시 구독을 하게 만든 콘텐츠가 있었으니, 이름하야 '솔로지옥'.
시즌 1부터 열심히 봐온 사람으로서 솔로지옥을 보지 않으시는 분들을 위해 포맷 설명을 해보자면, 이 프로 역시 솔로들이 나와서 자신의 짝을 찾아가는 연애 버라이어티쇼다. 나는 솔로가 마라탕, 환승연애가 단짠 소금빵 느낌이라면 솔로지옥은 캘리포니아 롤 같은 느낌. 일단 출연자들의 외양이 화려하고 제작진들이 작정하고 해외 연애 프로그램 (예를 들면 투핫 같은..) 같은 톤앤매너를 주고 싶었던 의도가 확실해 보인다. 출연자들의 애티튜드 역시 이에 부응하는지라 다들 자기소개부터 탈 한국인 느낌이다. 겸손? 없음. 부끄러움? 없음. '나 인기 많아, 어디 가도 안 꿀려. 네가 지금 날 안 좋아해 봤자 어차피 내가 꼬시면 다 넘어올걸?' 하는 태도가 디폴트. 다들 자기애와 당당함이 엄청나서 웬만한 항마력이 아니고선 끝까지 지켜볼 수 없지만, 보다 보면 또 귀엽고.. 요즘 애들은 저런가.. 싶기도 하고 묘한 매력이 있다.
내가 이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저런 당당함으로 가리려 해도 넘싯거리며 드러나는 본모습이 웃기고 짠하고 공감되기 때문이다. 원래 세상에 숨길 수 없는 게 기침과 사랑이라는데 아무리 말로 틱틱거리고 짜증 내고 자존심을 세운다 해도 이끌리는 마음을 눈빛에서든 손짓에서든 숨길 수 없는 인간이란 존재가 너무 귀엽고 웃긴 거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러브라인에 솔직하게 다 드러내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솔직함도 대단해 보인다. 본인의 지인, 회사사람, 가족들도 다 보게 될 프로그램에서 저렇게 모든 것들을 내보이고 감정을 드러낸다는 것,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게 깊은 감정과 생각까지 표현한다는 것이 얼마나 용기 있는 일인지 알기 때문에 느껴지는 감정이기도 하다.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 난.. 출연료 억 단위로 준대도 망설여질 것 같아..
솔로지옥에서는 선택받지 못한 사람을 '지옥도'에 머무르게 하면서 허접한 식사(생당근과 닭가슴살만 줘도 웃음을 잃지 않는 그들의 정신력은 대단하다)를 하게 만들고, 커플 매칭에 성공한 사람들은 화려한 호텔에서 근사한 식사를 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옥도에서 사랑이 싹트지 않는 건 아니다. 오히려 여유로운 시간을 활용해 바닷가를 산책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의 애정을 확인하고 새로운 감정이 싹트기도 한다. 바닷물의 수분이 마르면 소금이 뿅 하고 생기듯이, 자신도 모르게 사랑이 샘솟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옥도는 누군가에겐 천국도가 될 수도 있겠지. 이 역시 내가 솔로지옥을 보게 만드는 매력이다.
한때 우후죽순 생기는 연애 프로그램을 보며 혀를 쯧쯧찬 적도 있다. 하도 애들이 결혼도 안 하고 아무것도 안 한다니까 이런 연애 프로그램 같은 거 만들어서 연애하게 만드려고 이러나, 이게 근본적인 대책이 맞나 하며 화를 낸 적도 있고. 진짜 사랑을 안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랑해도 함께할 수 없는 발판이 없어 그러는 거 아니냐며. 하지만 근래 주위에서 스스로를 '무성애자'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이 느는 거 보면 정말 연애에 대한 관심이나 감정이 없는 사람들도 꽤나 많아진 것 같다. 개인적 성향이니 무어라 말을 보탤 순 없어도, 갈수록 연애 감정이 아니더라도 '사랑' 자체가 없어지는 건 좀 무섭고 아쉽다. 예전에 커뮤니티에서 '오징어게임처럼 인간의 악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거 하나도 안 궁금하다. 그런 악조건에서도 서로를 보듬자고 이제까지 인류가 노력해 온 것 아니냐'하는 글을 보고 크게 공감한 적이 있다. 여기에서 '서로를 보듬자고 노력해 온 것'이 나는 사랑이라 생각하는데, 최근 악에 맞서 어쩔 수 없이 악을 택하고 파멸에 이르는 내용, 털을 쭈뼛 세울 만큼 잔인한 것들이 쏟아지니 자꾸 사랑이 설 자리에 칼날과 총이 들어서는 느낌이다. 연애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게 수많은 사랑 중 일부의 모습이더라도, 조금 어설프고 뚝딱이더라도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자리를 좀 확보해 주면 안 되나요.
출연진들이 연예인 데뷔를 노리고 나온 거라느니, 진실성이 없는 짜고 치는 프로그램이니 말이 많아도 나는 당분간 볼 예정이다. 시즌 3에는 또 나는 솔로 출연진만큼이나 '대체 저런 사람은 어디서..?'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인물이 있어 심리학적 탐구 측면에서도(!) 아주 흥미롭다 하하. 주변에서도 슬슬 욕이 나오는 걸로 봐선 꽤나 호응이 있는 편인 것 같은데, 그저 도파민 중독인지 사랑 애호가 관점에서 흥미가 있는 건지는 보면 볼수록 알겠지. 그나저나 다른 사람 사랑하는 건 이렇게 재밌는데 왜 내 사랑엔 흥미가 없는가.....(먼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