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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Lucy Jan 22. 2024

당신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길래.

생각보다 거창한 게 아닐 수도.

요 며칠간 쉽지 않은 날들을 보냈다. 근래 PMS 시기가 되어도 크게 우울한 느낌이 없길래 기쁘기도 하면서 조금 두려웠는데 한 번에 떼로 몰려온 우울감이 나를 잠식해 우울이 무슨 직업인 양, 그리고 직업에 한껏 충실한 사람처럼 철저히 우울해하며 며칠을 흘려보냈다. 특정 대상 없이 화가 나고 먹은 게 없어도 배가 나오는 거야 이제 신경 쓸 축에도 못 끼지만 우울은 이야기가 좀 다르다. 한번 제대로 왔다 하면 어찌저찌 잘 쌓아왔던 이제까지의 삶도, 그렇게 노력했던 자신도 맥을 못 추고 쓰레기통에 갖다 버려도 될, 그러고 싶은 잔챙이가 되어버린다. 그런 내 눈앞에 드리워진 단 하나의 물음. '왜 이 인생을 살아야 되나?'라는 것.


일전에 법륜스님의 강의를 정리한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때 강연에서 누군가도 나와 같은 질문으로 외로운 심판을 받고 있었나 보다. 그분의 '왜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에 법륜스님은 이렇게 답하셨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 죽음 밖에 없다'라고. 맞는 말이다. 애초에 그 누구도 이 세상에 '내가 태어날 이유가 있다!' 하며 손 번쩍 들고 태어난 게 아니다. 그저 태어났을 뿐이고 그래서 살아간다. 누군가가 '태어난 김에 산다'라고 이야기하면 삶에 대한 진정성이 없느니, 왜 저렇게 대충 사냐느니 야유를 받기 십상이지만 실제가 그렇다. 삶은 그저 돌려라 돌림판에서 나온 가능성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고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이 문장을 쓰면서도 버석버석한 느낌이 목을 타고 올라온다.)


물론 법륜스님은 거기에서 답을 그치진 않으셨다. 뒤에 '그렇기에 각자가 만드는 삶의 의미가 중요한 것이다'라고 덧붙이셨다. 선택의 여지없이 신(이 있다면)이 정한 돌려라 돌림판에서 탄생을 점지받아 이 세상에 나왔다면 이제 '운 좋게' 삶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할 것인지 '운도 없게' 살아갈 의무를 부여받았다고 생각할 것인지는 본인 자유다. 심리학파 중 실존주의 학자들은 우리는 이 세상에 '던져진 것'이라고 표현하며 삶을 살아가는 어려움을 이야기하는데,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여기는 게 아닌 걸 보면 정말 삶은 생각하기 나름인 것 같다. 하루하루가 신나고 기쁘고 즐거운 사람도 있겠지만 아침의 무게가 고통스러울 만큼 무거워 기지개조차 켤 엄두가 안 나는 사람도 있으니까.


여기까지 일반적인 이야기를 끝내고 그럼 '왜 인생을 살아야 되나?'에 대한 개인적인 답을 이야기해 보련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래도 사는 게 낫기 때문이다'. 멋도 없고 별 독창적이지도 않은 답변이려나. 하지만 이게 진심이다. 삶을 이어감으로써 얻게 되는, 느낄 수 있는, 마주하는, 상상할 수 있는, 맛볼 수 있는, 생각하는, 쓸 수 있는, 바라볼 수 있는, 감지할 수 있는, 발 디딜 수 있는 것들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단순한 사람이라 저울에 올려놨을 때 뭔가 더 많이 올라가 기우는 쪽으로 내 마음도 쏠린다. 인생을 살아봐야 찍어 먹어볼 수라도 있는 것들이 이렇게 많은데, 과정인 중간다리에 서서 가타부타 이야기하는 것은 경솔한 일일 수도 있다. 이것 역시 수많은 어둠의 터널들을 지나오며 깨달은 것이다. '아직은 결론에 다다르지 못했다는 것'. 아직 써 내려갈 것들이 많으니까, 이렇게 끝은 아니니까. 그게 나에게 큰 용기와 위안을 준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가, 아직 이루지 못한 성취가, 집에서 나만 기다리는 반려동물이 삶의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삶의 의미는 많고 다양하고 개인적이다. 살다 보면 삶의 방정식이 정립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보니 그런 것들만이 삶의 의미라고 꼽아야 할 것 같은, 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바깥에 날리는 눈송이만큼 다양할 수 있음을 모르고. 누군가는 특정 대상을 너무 사랑하는 게 삶의 의미가 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특정 대상을 너무나도 증오하고 싫어하는 게 삶을 버티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더 글로리의 송혜교를 생각해 보자.) 후자의 경우 개인의 정신 건강에는 다분히 위해를 끼치겠지만 그렇다고 그게 의미가 될 수 없다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니 뭔들 어떠랴. 또, 삶의 의미라고 할만한 것이 없으면 어떠랴.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무엇이라도 있다면 그만인 것을. 너무 오랜 시간을 우울이 내 이유인 것처럼 굴었다. '그래도 사는 게 낫구나' 싶은 것들을 찾아 해야겠다. 


떡볶이도 '그래, 사는 게 더 낫다'를 생각하게 하는 요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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