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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Lucy Feb 14. 2024

17화. 30대 비혼주의자+백수 올 설에도 살아남았다

저는 이렇게 살아남았습니다 우하하!

드디어 왔다. 결혼 적령기 미혼남녀, 백수, 자식 없는 자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그때, 바로 명절이다. 요즘은 명절이라고 가족들이 다 모이는 경우도 적다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집에는 해당이 안 되는지라... 어쩔 수 없이 친척들 모임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이 그닥 가볍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거웠다는 말은 아니다. 다년간 경험에 의해 축적된 빅데이터에 근거해 올 설에 날아올 화살들을 막아낼 비기는 이미 세워둔 터였다. 자, 그럼 이제 돌진만 남았다. 돌격 앞으로!


올해 내가 세운 계획은 이랬다. 누군가 결혼 이야기를 꺼낸다? 그럼 이렇게 줄줄 읊어야지. "아, 저 결혼식 날짜 잡았는데 얘기 못 들으셨어요? 2047년에 할 건데 정확한 날짜랑 남편은 아직 못 정했어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하며 웃는 거다. 이 깜찍한 계획이 성공적일 거라 짐작한 나는 엄마에게도 이 레퍼토리를 읊어주며 "어때? 좀 귀엽지 않아?"라고 물었고 엄마는 깔깔거리며 내 솔루션에 동의를 해주었다. 결국 밥상에서 나온 누군가의 결혼 문의(!)에 엄마는 내가 얘기했던 그대로 얘기해 주었고 덕분에 화살 하나 정도는 가볍게 피할 수 있었다. 아, 가끔 결혼 얘기에 덧붙여 "언제까지 엄마아빠 옆에 붙어살려고 하냐"하는 질문이 들어올 때가 있는데 이땐 집값 얘기를 꺼내면 프리패스다.


자, 그럼 그다음. 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어떡하냐. 이럴 때는 무조건 열심히 살고 있다는 인상만 주면 된다. 만일 최근에 일을 안 하면서 게임만 하거나 유튜브 보는 것에만 몰입되어 있었다면 모임 전에 눈빛과 혈색을 좀 정리하고 갈 필요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운동과 루틴한 일로 훈련한 덕분에 만들어진 세상 말똥한 눈빛과 건강한 혈색으로 누군가 "요즘 회사는 다니고 있어?"라고 물을 때 "아니, 지금은 잠깐 쉬면서 혼자 이것저것 하고 있어" 대답하니 뒤에 별다른 잔소리가 붙지 않았다.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면(실제 그렇지 않더라도) 상대방이 별로 할 말이 없어진다. 


마지막, 자식 없는 자. 미혼이기 때문에 자식이 없을 확률이 높겠지만... 어쨌든 조카들을 둘씩 낳은 오빠, 언니들을 상대할 때는 청자로 들어주는 게 최고다. 주위에서 어쭙잖게라도 들은 '요즘 초등학생', '요즘 애들 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면 맞장구를 칠 때 "요즘 그렇다던데?" 하며 슬쩍 끼워 넣어주면 그만이다. 이 방법이면 상대방도 이야기하기가 한결 수월해지고 내 조카가 헤쳐나갈 험난한 미래에 대한 꿀팁을 얻을 수도 있다. 사실 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듣다 보면 부모가 되는 게 얼마나 험난한 일인지 느낄 수 있고, 그럼에도 부모의 역할을 기꺼이 택한 그들의 삶을 보며 툭툭 장난만 쳤던 언니, 오빠들에 대한 존경을 느낄 수도 있다.


자, 이렇게 깔끔하게 나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문제는 결혼 적령기 미혼녀, 백수, 자식 없는 자 이 세 가지 특징의 원인이 내가 아닌 부모님이 될 때다. 다행히 친척들 중엔 그렇게 비합리적이고 부적당한 언행을 선사하는 분들은 없지만 가끔 누군가 엄마에게 "아우, 어떡하려고 그래~ 얼른 보내야지~"하면 모른 척 "어라? 엄마아빠는 저 안 가도 된다고 하던데요?(=우리 엄마아빠가 괜찮다는데 생판 남인 당신이 왜 그러세요?)"하며 시치미를 떼면 그만이다. 엄마아빠도 이런 말에 "뭐 지가 맘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가겠지~"하고 넘기는 걸 보면 아직까진 위기감이 크지 않은 것일 수도? 히히.


명절 때만 보는, 왕래가 잦지 않던 친척들에게 이렇게까지 대비를 하고 가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뭐 어쩌랴. 간섭이나 오지랖이라고 생각하면 한없이 피곤해지고, 기왕 받는 관심이라면 제대로 즐길 준비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런 관심, 요즘 어딜 가나 받기 쉽지 않잖아요? 이전 세대에 살았던 그들의 애정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즐겨주면 그만입니다. 최근 라디오에서 박명수가 명절 때 결혼 언제 하냐는 질문에는 "이혼 언제 하세요?"라는 질문으로 되받아치라 말했다던데, 이런 막장 드라마식 멘트는 웃기긴 하지만 서로 안 볼 각오는 하고 던져야 할 것 같다.(인생은 드라마가 아니랍니다..) 어쨌든 이번 명절도 잘 지나갔습니다. 아자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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