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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담 Sep 21. 2022

잠시 길 잃은 개미가 되어도 좋아

휴직을 하고 수영 강습을 시작하다 (2)



1.

혼자 있는 순간은 좋아한다. 그렇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이 없는 공백을 잘 견디지 못한다. 그걸 깨달은지는 오래되진 않았다. 아니 벌써 오 년쯤 되었으니 오래되었다 봐도 될지도 모른다.



2.

과거의 내가 생각하던 내 모습은 느긋하고 낙천적이라 바쁜 일을 싫어하고, 한량처럼 누워 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해야 할 일이 여러 권의 책으로 쌓여있지만 그 책무들을 손으로 밀어내고 현재를 즐길 줄 아는 사람. 그래도 나는 대체로 잘 해낼 수 있어, 그런 착각을 했던 어린 시절이었다.



3.

십수 년을 출근하고 일을 하고 매월 그 노동의 가치를 눈으로 확인하는 시간을 반복했다. 내게 돌아온 보상을 소소하게 소비하기도 하고 미래를 위해 축적하고 계산하고 예측하는 것은 너무도 오랜 일상이자 나라는 사람의 습성이 되었다.



4.

공백은 못 견디지만 일이 하나 둘 생기면 그것을 쌓아두고 쌓아둔다. 일이 한두 가지에서 두세 가지를 넘어서고 많아지면 어느 순간 숨이 턱 막히기 시작한다. 빠릿뻐릿하게 일처리를 안 하고 모아두었던 탓에 다 해낼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이 커지는 순간,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몸은 느슨한데 숨은 가빠진다. 일의 마감에 쫓길 때도 자주 그러했다. 긴장도가 높아지면서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내 몸과 마음이 따로 놀면서 혼란이 커진다.


생각을 비워내야 해, 불안해하지 마,

그럴 시간에 일을 하나씩 처리하면 되지,


생각을 해본다. 예전엔 그게 잘 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생각을 비워내지 못해 불안이 이어졌던 시간들.



5.

생각만으로 숨이 가빠지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호흡은 얕아지고 빨라진다. 예전에도 숨 막힘과 긴장을 해소하지 못해서 괴로운 시간들이 많았었지, 생각하며 수영장에 들어섰다.


언제나처럼 이날도 강습에 조금 늦었다. 다음엔 꼭 안 늦어야지 생각하면서도. 스스로 좀 심각한데 라는 인지와 함께.



6.

가장  레인에 도착해서 걸터앉으며 발끝을 물속에 밀어 넣었다. 샤워를 하고 수영복을 입고 물에 풍덩 들어가도 여전히 더웠던 8월의 수영장  온도가 아니었다. 발끝 이자 긴장이 생겼다. 물에 들어가 서서 킥판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았디. 발꿈치에 조금 힘을 주며 점프하듯 다리를 밀고 얼굴 물에 넣었다. 다시 한번 매끄러운 추위가 내 온몸 감쌌다.



7.

발차기를 하고 팔 동작을 하면서 몇 바퀴를 돈다. 킥판을 두고 자유형으로 천천히 25m 레인 끝까지 도착하고 일어섰다. 발차기 몇 번 팔 동작 몇 번 한 것뿐인데 숨이 가빠온다. 생각만으로 답답해지던 숨 막힘과 달리 몸의 움직임과 함께 생긴 숨 가쁨은 도리어 몸의 긴장을 해소해준다는 것을 느끼면서 두어 바퀴를 더 돌았다.

몸이 더워지고 차갑던 수영장 물도 미지근한 물처럼 느껴진다. 그제야 비로소 여러 생각과 걱정들로 뒤엉켜있던 것들이 제 자리를 찾아간 듯했다.



8.

물속에 얼굴을 집어넣는 짧은 순간, 시야를 넓혀 좌우를 짧게 둘러보았다. 물속을 유영하는 다른 사람들의 몸짓이 보였다. 1초도 안 되는 아주 짧은 시간, 물에 떠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슬로모션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드라마 우영우에서 고래가 나타날 때면 매번 음향과 함께 슬로우모션으로 연출이 된다. 영상의 연출이지만 우영우에게는 정말로 그렇게 느껴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의 상대성이론을 떠올리면서.


물에 떠있을 때만큼은 중력을 벗어날 수 있다. 편안함과 자유로움과 속도감이 물살과 함께 온 몸에 휘감긴다.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이 건강한 것은 꼭 신체로 드러나는 결과(체중감량, 탄탄한 근육 등)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9.

길이 없는 곳에 서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 3회 정해진 시간을 써야 하는 수영이라는 운동을 선택한 것은. 내 인생에서 직장을 내려놓겠다는 결심과 다름없는 휴직을 했다. 출퇴근이 없어진 일상 속에서 길 잃은 개미가 되었다. 반복되는 소소한 일과는 물의 흐름에 몸을 맡겨 부유하는 자유로움과 함께 안정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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