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자의 커피 단상
전기포트에 물을 반 컵 넣어 스위치를 딸깍 누르고 스타벅스 인스턴트커피를 뜯어 유리 머그잔에 부었다. 곧 물이 끓었고 뜨거운 물을 부어 인스턴트커피를 녹였다. 냉동실 얼음통 뚜껑을 열어 동그란 아이스볼을 꺼내서 넣고 찬물을 더 부었다. 얼음통에 따로 보관한 얼음에서는 냉동실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언젠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느 냉장고 가격의 두배 값을 하는 시그니처 냉장고로 바꾼 이후 삶의 만족도가 너무 높아졌다고 했던 이야기.
“언제 어느 때고 얼음을 바로 꺼낸다는 게 얼마나 편하다고요. 게다가 냉동실 냄새가 배어있지 않아서 더 좋아요. 다른 건 몰라도 냉장고만큼은 다음에 시그니처로 사요.”
그 말에 나도 다음 냉장고는 얼음정수기냉장고를 사야지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시그니처 브랜드는 가격이 비싸도 너무 비싸니깐 후보 리스트에서 시그니처만 줄을 긋듯이 지워두었만. 그분에게는 요리하는 것이 삶의 즐거움이자 기쁨이지만 난 아니니깐. 실용적인 제품이고 얼음 정수기가 있는 제품이면 괜찮을 것 같아 생각하면서.
지난번 트레이더스에서 사 온 락앤락 아이스볼 메이커 세트를 들이고 여름이면 꼭 부족해서 아쉬운 얼음 문제가 해결되었다. 두 세트를 냉동실에 넣으면 한 번에 큰 얼음 볼 열두 개를 얼릴 수 있으니 얼음 양도 넉넉했다. 더 만족스러웠던 건 얼음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예상치 않게 얼음 냄새까지 잡는 기특한 제품이었다. 얼릴 때에는 위아래 틀을 꼭 닫아서 얼리고 틀에서 꺼내면 세트에 함께 있는 얼음 넣는 플라스틱 밀폐 통에 옮겨 넣어두었기에 냄새가 나지 않았다.
넉넉한 얼음에 뿌듯함을 느끼며 얼음 하나를 더 넣었다. 거실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어느새 오후 네시. 오후 네시에 오늘 처음 마시는 아이스커피였다.
아침에는 부족하지 않을 만큼 잠을 실컷 잤고 그리고는 시간 맞춰 바삐 아침반 수영강습을 다녀왔다. 머리를 쓰는 일이 없다 보니 아침에 커피를 마실 이유가 없었다. 점심으로 방학이라 집에 있는 수인이와 재택근무를 하는 남편에게 김치 참치 덮밥으로 간단한 한 끼를 차려주었다. 밥을 먹고 요즘 한껏 예민한 남편과 뜨거운 햇살과 열기 속에 동네 산책을 다녀왔다.
흐트러지는 정신을 부여잡기 위해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되는 하루. 집중력을 높이기 위한 커피 한잔의 의식도, 반복되는 일과를 시작하는 나를 위해 일부러 맛있는 커피를 찾아 마시는 호사도 필요가 없는 휴직자의 일상.
12년을 일하고 첫 번째 휴직을 했던 5년 전에는 갑자기 생긴 나와의 공간과 시간에 어쩔 줄 몰라했다. 휴직기간에 굳이 뭘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은 일상적인 일들이 반복되자 정신없지만 허전했던 순간들도 종종 있었던 것 같다.
나와의 대화를 멈추지 않고 다시 마주한 두 번째 휴직은 달랐다. 여유로우면서도 또 때때로 바쁘다. 허전할 틈 없이 하루의 시간은 빼곡하다. 그 틈 사이에 여유와 빈 시간도 포함되어있지만 허전하거나 불안하지 않다. 해야 할 일들이 무작위로 떠올라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종종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숨 쉴 틈이 생긴 하루하루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내 마음대로 보낼 수 있는, 자유와 여유가 있는 시간들을 오히려 불안하게 느껴왔다니. 고정소득을 위해 소속 안에 나를 꼭 넣어야만 했던, 자유를 모르고 살아온 지난 긴 시간을 생각하면 약이 오르기도 한다. 물론 그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이 있는 거라서 앞뒤가 바뀐다면 고통스럽겠지만 말이다.
직장인에게 자유란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가치였다. 성실과 꾸준함, 역량개발과 경험을 위해 직장인으로 경제적 활동을 하는 시간은 가능하다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내 경제활동의 끝을 직장생활의 끝과 나란히 두려 했던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었다.